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우 Mar 19. 2022

교수님 저는 말하는 감자예요.

이 자리는 깊게 생각해야 하는 자리였군요. 저는 무얼 하면 될까요?

어찌 보면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진학 대신할 수 있는 취업이란 길도 있었고 심지어 관심 있는 분야의 인턴생활도 했었다. 일이 적성에 아주 안 맞은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차하면 다시 인턴 했던 그 분야로 돌아갈 생각도 하고 있다. 근데 그냥 주어진 숙명인 것 마냥 나는 대학원에 가는걸 당연하게 여겼고, 졸업을 앞두고 아무 생각 없이 원서를 넣었다. 왜 그랬을까?


"시우는 무슨 연구를 하고 싶어요?"


연구실에 있게 된 지 일주일 차,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내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이 언젠가 오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일주일 차라니. 질문을 듣자마자 얼어붙었다. 진짜 아무 말도 못 했다. 하고 싶은 연구가 있어서 진학한 게 아니니까. 심지어 아는 분야도 아니고 전공도 아예 다른 분야로 와버렸으니까. 그냥 정말 넓게, 크게, 두루뭉술하게 '기후변화에 대해서 공부해보고 싶다'라고 대략적으로 생각만 했을 뿐이니까. 순간 아무 말 못 하고 정적이 몇 초간을 독점하도록 내버려 두어 버렸다. 그리고 그 내 시간을 정적으로 채워가면서, 동시에 어디선가 날아온 불안한 생각들이 내 마음을 채웠다. '아, 무언가 해야겠단 생각을 해야지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구나.', '나는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닐까?' 따위의 불친절한 친구들 말이다.


"어 그게... 어 일하면서... 앞으로는 기후변화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어.. 어려울 것 같아서.. 음... 그래서... "


결국 그 정적을 못 버티고 경거망동스러운 내 머리는 의미 없는 단어들을 내뱉도록 허락해버렸다. 유감스럽게도, 이왕 가치 없는 이야기를 하게 된 거 뻔뻔하고 당당하게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낯 뜨겁고 부끄럽고 난처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나 보다. 교수님은 웃으시며 열심히 해보라고 하고 불어 터지고 있는 쌀국수를 가리키며 식기 전에 먹으라고 웃어주셨다. 감사합니다 얼굴도 모르는 선배님들.



원래는, 빨라도 2월 중순이나 되어야 연구실에 나가면 되겠지 싶었다. 새로 진학하게 된 학교는 코로나 때문에 학생증이 없으면 아예 건물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학교도 나를 이렇게 밀어내는데 '설마?' 했다. 따지고 보면 3월 2일 전까지는 나는 그저 외부인일 뿐인데, 그전에 출근을 당연히 안 시킬 거라 생각했다. 물론 이공계 연구실들은 보통 한 학기 정도 먼저 학부 연구생을 한다고 들었긴 했지만, 최대한 내 입맛대로 생각했다. 원래 사람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딱 거기까지. 생각만 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반은 갔을 거다. 1월 설 연휴를 앞둔 어느 날, 잘 모르는 분야로 진학한다는 것이 너무 마음에 걸리고 불안해서 교수님께 이메일 한통을 보냈다. 입학 전까지 어떤 공부를 하면 좋을지 여쭤봤다. 정말 가볍게, 교양 삼아 공부할게 뭐가 있을까 싶어서 보냈다. 하지만 5분도 안되어서, 교수님께 연락이 왔다. 이메일 끝에 써둔 서명에 전화번호가 있어서 연락했다고 하시며 운을 뜨셨다. 지금 프로젝트에 앞서 제안서를 쓰고 있는 것이 있으니 다음 주부터 출근하면서 옆에서 보고 도우며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살면서 이런 연락을 처음 접해봤던 터라 거절할 새도 없이 '네!' 하고 대답해버렸다. 나 참 생각 없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단 생각이 든 건 전화를 끊고 약 3시간 뒤부터였다. 교수님 말씀대로, 옆에서 보고 도우면 뭔가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원래 먼저 잡아뒀던 일정들 정리만 하고 있었다. '별 문제 될 게 없으니까. 어차피 해야 할 출근 한 달 먼저 하면 좋지!'라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 가벼운 생각 속 빈틈에 문뜩 불안한 생각이 몰려왔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정말. 문자 그대로. 나는 통계도 돌릴 줄 모른다. 진학하는 분야와 관련된 책 몇 권과 교양수업 들은 게 전부였다. 논문? 국문 논문 몇 개 읽었던 게 전부다. 솔직히 내가 왜 이 학교에 붙었는지 모르겠다. 떨어진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그 사람보다 무엇이 나아서 붙은 걸까? 붙은 만큼, 내가 무언갈 증명해야 하는데 할 자신이 없었다. 너무 불안한 마음에 이메일을 보냈다.


'제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괜찮을까요?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여기에 "아 그러세요? 그러면 공부 더 하고 오세요~"라고 할 교수님이 어디 있겠느냐. 당연히 괜찮다고 하지. 나 같아도 그럴 것 같다. 그저 너무 불안한 마음을 상대한테 고스란히 표출시킨 것 이외에 그 어떤 영양도 없는 말을 해버린 것뿐이다.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사람이 본인이 가장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상대에게 언질을 주곤 한다고. 미리 나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려는 자기 방어 같은 행동인가 보다. 정말 인간미 넘치게 나에게 별 기대하지 말라고 교수님에게 감정을 투척해버린 것뿐이었다. 사실 내가 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었으면 조금 짜증 났을 것 같다. 뭐 어쩌라고? 하며. 나는 인간이 덜 됐다. 당연하게도, 교수님은 괜찮다며 출근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셨고. 깜짝할 사이에 연구실 단톡방에 초대가 되었다. 이제 물러설 곳은 정말 하나도 남지 않았다.


.


사실 어느 자리든, 사람들 속에 마련된 내 자리라는 곳에 서 있는 이유에 대해서 명확히 모른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하다못해 일이라도 했으면 가볍게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핑계라도 댈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인생이라고 다들 이야기 하지만, 방향도 모른 채 물 위에 배를 띄어 그저 둥둥 떠다니는 건 보통 표류나 조난이라고 그러지 않나? 그것도 나름 재미있는 모험이라면 모험이겠지만, 나는 그런 모험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닌가 보다.


하고 싶은 게 명확히 있어서 이 자리에 있다고 하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어도 용납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반대로 하고 싶은 게 명확하게 없지만,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이런저런 일을 도우면서 무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둘 다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연구실에 자리가 생긴 지 이제 두 달이 지났는데, 솔직히 말해서 아직 있는 일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딱히 모르겠다. 다들 괜찮다고 독려해주시지만, 꼴에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괜히 마음에 차지 않는다.


이 하염없는 수렁에 스스로가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건 당장은 나를 위해서도 그다지 좋지 않고, 앞으로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당장 불안감을 조금 덜어내려면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대학원 원서를 쓸 때 미리 했었어야 하는 작업인데, 그걸 이제 와서 하고 있는 게 조금 우습다. 내가 왜 연구를 하려고 하는가, 이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나한테 왜 필요한가? 물론 가볍게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원서도 넣었고 여기에 앉아있는 거겠지만, 조금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었다.


빈 노션 페이지에 내가 여태까지 무얼 했는지 다짜고짜 모두 적어보았다. 나름의 일관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와중에 무언가 방향을 찾아낼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있었다. 아예 거짓된 삶을 사는 게 아니라면 내가 여기까지 흘러온 이유가 족적에 분명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 판단은 딱히 틀리지 않았고,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야기 따위는 생각 외로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경로가 명확해지자, 그다음 해야 할 일도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적어도 하고 싶은 게 명확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