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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경 emb Apr 29. 2024

한을 위한 레퀴엠 -1

이문세 - 휘파람


한을 만난건 어느 철거촌 현장이었다.


매일이 설레던 스무 살이었다. 책으로 배우던 세상과 정의감이 머릿속에만 머물러있지 않길 바랬다. 


어찌어찌 처음 철거촌 현장을 찾아갔다. 원주민들을 배려하지 않는 재개발 공간이었다. 빨간 락카로 '해방'이란 글씨가 써져 있던 그 곳엔 또래들이 많았고, 나는 조금 설렜다. 배우지도 못한 기타의 줄을 튕겨대며 나는 그들과 금방 친해졌다. 



철거촌의 투쟁 공간 가운데에는 자율배식대가 있었는데, 아무나 밥을 퍼먹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다섯시쯤 철거촌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쩐지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혼자 밥을 담아 식탁에 뻘쭘하게 앉아 있는데, 한이 다가왔다. 스무살 언저리었고, 또래같진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반말로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대 사회대 학생인 한은 어느 진보 정당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는 나 같은 쌈마이와 달리 정말 사회운동을 하고 있었고, 대학 총장실 점거 사태의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

사실 그런 사건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한은 그런 스펙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나와 한은 이야기가 잘 통했다. 우리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과 나는 아주 가끔 연락을 했다. 그와 따로 만나서 몇 번 밥을 먹기도 했다.

결단코 설레는 감정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한을 존경했다. 한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뇌가 섹시한' 사람이었다.

한에겐 열정과 신념이 있는데, 거만하지 않고 똑똑했다. 공부를 좋아하지만 세상을 등지진 않았다.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 있으면서도 타인을 배척하거나 몰아세우지 않았다.

서로 자신의 이야기만 하기 좋아하는 집단에서도 한은 일단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격양되었을 때 가장 현명한 답을 찾아냈다. 나는 한의 그런 모습이 정말 좋았다.


어느날, 우리는 강남역 근처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갔다. 그저 그랬던 파스타와 피자를 먹으며 셀카 찍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어떻게 그렇게 사진을 잘 찍냐고 물어보니까, 한은 웃으며 단점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는 입이 콤플렉스인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입을 가리고 찍는다 했다.

난 웃었다. 그게 뭐야. 그럼 내 단점은 뭘까. 그건 네가 찾아야지. 한은 피자에 칼질을 하며 피식 말했다.


그 다음은 한이 키우는 고양이 이야기를 했다. 한은 고양이를 안고 셀카를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자연스럽게 입을 가리는 건 이런 거야. 고양이의 표정이 심통맞아 나는 또 웃었다.




철거촌 문제가 마무리되었다. 한과 내가 처음 만났던 공간이 없어졌다.

나름 열심히 철거촌 활동을 하던 나는 다른 조직에 들어가진 않았다. 열정이나 세상에 대한 관심이 식은 건 아니었는데, 다만 그 작은 세상에서 오가던 숱하고 보잘것없는 입싸움이 조금 피곤했다. 조직이나 사회운동은 나와 안맞는다고 느꼈다. 나는 대학에 집중했고, 한과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기자라는 직업에 관심을 가졌을 때쯤 다시 한이 생각났다. sns에서 그를 찾아봤다. 한은 PD가 되어 있었다. 

나는 마침 그 회사에 지원서를 내려 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친구 추가를 눌렀다. 그는 수락했다. 한이 날 기억하고 있는지 확실하진 않았지만, 한이 날 기억한다고 믿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의 게시물에 가끔 좋아요를 눌러주었다. 따로 만나거나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어색하진 않았다.

한이 PD란 자리에 있다는 건 너무 당연해 보였다. 한은 내가 아는 한 세상을 가장 잘, 그리고 올바르게 빚어내어 세상에 내놓아줄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실종되었다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사흘 후, 실종되었다는 글은 한이 세상을 떠났다는 글로 바뀌었다. 



-계속-



그대 떠난 여긴
노을진 산마루턱에
아직도 그대 향기가 남아서 이렇게 서 있어
나를 두고 가면
얼마나 멀리 가려고
그렇게 가고 싶어서 나를 졸랐나


그대여 나의 어린애
그대는 휘파람 휘이이
불며 떠나가 버렸네
그대여 나의 장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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