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밑천이 드러나면 어쩌지"라는 모든 20대에게

애초에 밑천은 없을 거야, 우리는 그저 각자이고 또 각자일 뿐이니까.

by 밍경 emb

A와 B와 나는 비슷한 성장환경을 거쳐왔다.

교육열 좀 있다는 동네에서 나고 자란 셋은 자사고에서 만났다. 2008년 1학년 교실에서 처음 모인 뒤 재수를 거쳐 나쁘지 않은 대학들에 합격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난 2019년.

졸업 직후 대기업에 입사했던 A는 3년차를 앞두고 '술먹고 토하기' 진절머리가 난다며 퇴사했다. 반 년 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하며 살다 외국계 에이전시 회사에 들어간 뒤,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은 회사에서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많이 쓰며 일한다.

교육 관련 학과를 나온 B는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는 교사 자격증을 제쳐두고 경영학과 수업을 들었다. 다양한 길을 모색하다가 유명한 회사의 컨설턴트로 취직했고, 프로젝트를 맡으며 밤을 새고 있다.

셋 중 가장 공부를 못 했던 나는 팔자에도 적성에도 없는 경영학과에 적응하지 못했다. 본 학과 공부를 제쳐두고 겉돌았고 결국 사회과학쪽 복수전공을 받아 졸업했다. 경영학과에서 달랑 친구들 몇 명만 남긴 채, 설마설마 했던 기자라는 직업을 기어코 갖게 돼 글을 써서 먹고산다.


shoes-828414_960_720.jpg


출발과 과정은 비슷했으나 결과는 천차만별인 셋이 어느날 저녁, 동네 수제맥주집에서 갑자기 만났다.

연애와 사랑, 일과 사람 이야기를 공유하던 우리는 맥주 서너잔이 들어가자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았고, 그 과정에서 우린 결국 같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잘난 게 없어

나는 잘 하지 않아

나는 불안해

지금까지 내 성과는 모두 운이었어

세상이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알아버리면 어쩌지?

내 밑천이 드러나면 아무도 나를 인정하지 않을거야

다른 사람들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 나는 너무 초라해

미래가 무서워, 나의 전문성은 어디에 있을까.


공감했고 씁쓸했고 놀라웠다.

나는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모범생은커녕 인생 막 살다가 어찌어찌 자사고에 합격했던 나에게 반1등은 예사도 아니라던 A와 B는 그저 대단한 친구였다.

지금 와서는 필요 없던 감정이라 확신하지만 당시의 난 친한만큼 나와 내 친구들을 비교했다. 그리고 괴로워했다. 친하니까 더 힘들었다.

그 지난한 과정을 가까스로 끝낸 건 우리의 미래가 갈라지려고 손짓하던 대학 입학 이후에서였다.


그랬던 친구들이 못났었던 나와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되돌아보니, 나의 불안과 초조함은 능력과 별개로 2000년대의 학창시절을 겪은 우리들의 공통된 트라우마였다.

여전히 내 눈에는 대단한 그 아이들이, 자신의 처지 중 가장 부정적인 것들만을 꺼내, 자신의 정체성으로 만들어버린 뒤, 누가 능력을 칭찬해도 그건 운빨일 뿐이라며 치부해버리는 그 자학의 고리를, 나는 도저히 사회를 탓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각자의 불안함을 한참 털어놓다가, B는 툭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차피 우리는 평생자격증을 따거나 로스쿨을 1등으로 졸업해도 지금처럼 똑같이 불안해했을걸."


자아라는 게 생긴 뒤 단 한 번도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게 당연했다.


A의 근무지에는 30대 초반의 중동 출신 상사가 있다고 했다. A는 어느 날 상사와 밥을 먹다가 나눈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사람이 자기는 self-confidence(자존감) 가 너무 높아서 고민이라는거야. 겸손해야 할 때도 겸손하지 못 해서 난처해진 적이 있다는데, 특히 한국에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대"


나는 프랑스 교환학생 시절 만난 아이들이 생각났다. 발표 조를 짜기 전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 나는 "몇 살이고 한국에서 왔고, 영어도 불어도 못하지만 열심히는 해보겠다"고 온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그러나 다음 발언자였던 남미 친구는 "이름은 뭔데, 노래만큼 프레젠테이션을 잘 해. 이쪽 분야에 관심이 생겼고 수업도 들었으니, 발표를 잘 하고 싶으면 나와 같은 조를 하자"고 자신을 소개했다.


생각을 정리할 때쯤 B가 대화를 이어갔다.

"나를 깎아내리는 게 자극제가 되어서 더 큰 일을 해내고, 주변 사람들이 날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나조차도 그걸 뿌듯해하면 뭐 해? 난 그냥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힘든데."


"너무 힘들다"

두 단어를 내뱉는 게 나 스스로의 그릇을 한없이 작게 작게 만드는 것 같아 언제나 그 말을 꾹꾹 삼키고 불안해했다.

모두가 피해자인 사회에서 나도 A도 B도 그저 사실은, 그냥 괴로워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이런 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 글을 읽은 뒤로도 우리는 늘 괴로워하며 살겠지만.

애초에 밑천은 없을 거야, 우리는 그저 각자이고 또 각자일 뿐이니까.


(끝)

emblem0403@gmail.com

keyword
작가의 이전글수능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