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외식을 나갔는데 길을 잃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무작정 헤맸는데 어쩌다 들어간 골목은 이제 막 개장을 하려는 홍등가였다.
날씨가 쌀쌀했는데 여자들은 다들 얇은 원피스만 입었다. 그게 '홀복'이라고 하는 업무용 옷이고, 꽤 비싸다는 걸 알았을 땐 스물을 한참 넘었다.
붉은 빛이 쏟아지는 유리창 안에서 한 여자가 걸터앉아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밖에서는 하이힐을 신은 다른 여자가 담배를 피웠다. 아이에 아내까지 옆에 있는데도 여자들은 아버지에게 "놀다가라"며 손짓을 했다. 가족 모두 호들갑을 치며 도망나왔는데 꽤나 인상깊었던지 아직도 그 골목을 기억한다.
출처 중앙일보
다른 한편으로 영등포는 노숙의 성지였다. 이것도 직접 경험한 기억이 있다.
막 대학에 입학했을 때, 친구들을 만나러 가면서 영등포역을 지났다. 1호선을 타러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는 길에 피를 뚝뚝 흘리던 노숙인을 지나쳤다.
한참을 기른 듯한 희끗한 수염에 꼬질꼬질한 얼굴, 그리고 깊게 패인 주름과 회색이 되어버린 흰 모자.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어디서 칼에라도 찔린건지 손가락 사이로도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공익처럼 보이는 청년이 병원에 가야 한다고 재차 화를 냈지만 노숙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자와 수염으로 가려진 얼굴 속에서도 거부의 표정은 분명했다.
대합식 돌바닥까지 이어진 핏방울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나의 영등포 기억은 완성된다.
타임스퀘어와 신세계백화점는 일종의 혁신이었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쇼핑센터를 홍등가 바로 옆에 세운 뒤 영등포는 옛날 이미지를 참 많이 벗겨냈다.
그러나 편견이란 무서워서 내 머릿속 영등포는 여전히 열넷과 스무살 언저리를 오갔다.
몇년 간 영등포를 꺼린 이유였는데, 며칠 전 불가피한 약속이 생겨 타임스퀘어에서 지인을 만나게 됐다.
오후 3시쯤이었다. 밥을 먹지 못해서 지인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지하 1층 식료품 코너로 갔다.
들어던 데가 하필 디저트 코너였는지 빵과 아이스크림, 뭐 그런 것들이 잔뜩 있었다.
지인과 와플 두개에 커피 한 잔, 아이스크림 하나를 골랐다. 이만원이 조금 넘었고 내가 계산을 했다.
지인과 볼일을 마치고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타임스퀘어에는 맛집이 없고 걸어서 10분만 가면 자기가 아는 양고기집이 있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