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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경 emb Jun 14. 2020

유빙의 조각

변한 줄도 모르고 그렇게 열심히 욱여넣고 있었다.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신철규 作 <유빙> 중-



"어디선가 시를 봤어" 나는 말했고 넌 고개를 들었다. 연남동의 거리, 그러나 흔해빠진 프랜차이즈 카페의 구석자리에서 우리는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 시가 말하는데, 입김으로는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대."

점심을 거하게 먹어 배부르지 않냐고 묻고 대답을 기다리던 너는 갸우뚱한다. 얼음이 녹아 물방울이 맺히는 커피를 휘젓는다.

"눈물로는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는데, 다시 눈물로 얼어붙게 만들기도 한대. 그러니까…"

아주 잠깐 말을 잇지 못했는데 그 사이 너의 눈을 봤다. 너무나 차이가 없는 눈이었다. 더 슬퍼질까 서둘러 다음 말을 뱉었다. "우리, 이제 헤어지자."


너는 울고야 말았다. 울어버리는 너에게 차마 시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나는 커피를 바라보며 이 놈의 종이빨대, 눅눅해져 늘 싫기만 했던 이 황토색 빨대를 속으로 탓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갑자기. 겨우 말을 꺼낸 너는 이렇게 말했다.

짧은 두 문장에 대한 답이야 할 수 있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일까 싶었다.
"그러니까, 나는 널 많이 좋아했고. 그래서 멈추어버린 거야, 더 가도 유턴 사인은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일었거든."

이젠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잘 모르겠어. 그래도, 잘 살길 진심으로 바랄게."


눈물은 사람을 감동시켜 태도를 바꾸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람의 결심을 확고히 얼려버리기도 한단다. 그런 시를 읽어버렸을 때 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같은 행동과 한결같던 말이 어느날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 그저 혼란스러웠다. 혼란의 의미가 뭔지 모르겠으니 일부러 일을 만들고 바쁘게 하루를 살았다. 접촉면이 줄어드니 조금은 괜찮아 보였다 그렇지만.


혼란은 사실, 사랑의 변화를 애써 부정하기 위한 방어기제란 걸 나는 시를 읽으며 자각한 것이다.


좋아했던 기억만큼이나 중요한 게 소중한 끝이란 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 마무리가 다가와야 한다면 어느 단편 영화가 그렇듯 말 없이, 서로를 온전하게 만든 시간이었다고 되짚으며, 서로의 안녕을 빌며, 잘 다듬어내고 싶었다.

참 쉽지가 않았다. 이별 직전의 지난함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너와 손을 잡고.

마치 커피를 이 눅눅한 빨대로 마시듯 맛이 변한 줄도 모르고 그렇게 열심히 욱여넣고 있었다.


먼저 나온 길거리는 여전히 더웠다. 기록적인 폭염을 기록할 것이라는데 아직도 나는 9부짜리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여름이 빨리 찾아왔다. 옷장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가 좀 더 카페에 있다가 나오면 좋겠다고 바랬다. 이토록 작열하는 날인데 너는 더위를 참 많이 타니까. 자취방에 에어컨이 없다고 답답해하던 너니까.


뒤돌아보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더 가면 유턴 사인이 나왔을까. 확신할 수 없고 또 무의미하다.

닥쳐올 일도 알 수는 없기에 나는 그토록 용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너는, 좀 더 더위를 식히고 나왔으면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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