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내게 호의를 베풀던 낯선 곳의 기억을 되살리며
느슨한 관계를 시작하다
나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2008년 봄이 오기 전의 추웠던 어느 날, 나는 한국 생활을 접고 편도 티켓을 끊고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마음은 창밖 구름처럼 두둥실 떠서 갈피를 잡지 못했고, 나는 줄곧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행으로 갈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에 문득 겁도 났다. 부모님을 따라갔던 어린 시절 외국에서 경험하던 생경한 그 느낌과 완전히 다른 내 의지로 편도 티켓을 끊고 한국을 떠나서 그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곳에서 3년이란 시간 동안 어떤 사람을 만날지 전혀 몰랐고(기꺼이), 이방인으로서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고 (거리낌 없이), 그들이 무슨 배경을 가졌는지 모른 상황 (격이 없이)에서 타인과 어울리는 경험을 연속적으로 하게 된다.
처음부터 '기꺼이' , '거리낌 없이', '격이 없이' 타국에서 생전 모르던 사람들과 어울린 것은 아니었다. 일을 하기 위해 처음으로 살아보는 도쿄였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버벅거렸다. 여행으로 올 때의 느긋한 마음가짐이나 어학원을 다니면서 단계별로 적응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리스크를 감당하고 취업비자까지 내어준 일본 회사와 주변 동료들에게 적응을 빨리하고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헛발질을 하는 횟수도 늘어났다. 여담이지만, 이때 나는 사람의 암기력과 집중력이 절박함에 비례해 수십수백 배로 증폭된다는 것을 강제로 체험했다.
(수험생 성공일기에나 적혀있을 법한 '하루에 책 한 장씩을 통째로 외우고 외운 페이지는 찢어버렸어요'를 실제로 반년 동안 실행했다.)
그렇다. 내가 생각했던 '외국에서의 생활' 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적응해야 했던 삶'을 살았다.
그런 내게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
거짓말 같았다. 잔뜩 위축된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날씨가 좋으니 에비스 주변을 돌다가 자마이칸 음식점이 새로 생겼다며 데려가던 직장 동료부터 이방인의 삶의 힘들고 복잡한 감정을 익명의 힘을 빌어 토로하던 마이크로 SNS에서 '꽃놀이' 태그를 보고 온 사람들과 꽃놀이를 하러 가고, 내 일본어가 이상하다며 지적하던 깐깐한 일본인이 '너 게임 좋아하지?'라면서 집에 있던 패미콤 게임이 필요 없어졌다면서 한 박스채 내밀었다.
또한, 그 일본인 친구가 바비큐 파티 모임에 갑자기 나를 초대하며 수십 명의 모르는 일본인들 사이 유일한 외국인으로 끼어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떠들기도 했다. 그들은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도 아니었으며, 내가 어떤 배경을 가진 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 순간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또 타이밍이 맞으면 다시 보고 그게 다였다.
그 모습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즐거웠다. 그렇게 3년을 우연함의 연속 속에서 느슨하게 이어진 관계 속에서 보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계획하지 않은 귀국을 하게 되었다. 도쿄를 떠나게 된 것이다. 3년 만에.
한국에서 시작한 느슨한 관계
기꺼이, 거리낌 없이, 격이 없이 즐겁게 살아야겠다
도쿄를 떠나는 편도 티켓을 끊고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3년 전 도쿄 하늘 위 구름을 보면 두리뭉실하고 복잡한 기분 속 불안함에 편도 티켓을 쥐고 있던 내 마음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한참 동료들과 함께 달려야 할 사회생활 5년 차에 들어서자마자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3년 만에 이직과 동시에 다시 한국의 사회로 편입되는 것에 걱정이 앞섰다. 공백 기간의 3년 동안 다른 이들은 소위 한국에서의 사회 인맥을 쌓아가며 대부분 동기들은 과장 직급을 달고 조직 내에서 꽤나 인정받는 포지션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다시 초기화된 채로 잘 적응하며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불안함보단 두근거림이 컸었다.
활주로에 착륙하는 둔탁한 바퀴와 지면의 마찰음과 더불어 반동에 의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뒤로 몸이 젖혀질 때쯤 한국에 돌아온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지난 3년간 도쿄에 살면서 내가 느낀 감정을 떠올렸다.
느슨한 관계 속 즐거움 추구
그래 일단 부딪혀보면서 즐거움을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예상보다 직장생활은 빡빡했다. 해외사업부에 배속되어 늦은 밤까지 계약서를 작성하고 검토하고, 매출 상향을 위해 개발과 현지 파트너사 조율한 내용 정리하고, 현지화 콘텐츠를 체크하고 관리하는 타이틀은 계속 늘어났고, 해외업체가 오는 날이면 늦게까지 미팅하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것까지...
종점과 종점이었던 회사-집. 강북 끝머리의 산속 집에 도착하면 녹초가 되어 쓰러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에너지를 북돋워주는 것은 바로 일본에서 살면서 체득한 '느슨한 관계 속 즐겁게 사람들과 노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 삶 속의 어느 지점에서 만난 사람들이었고, 때로는 스쳐 지나간 것처럼 일순간이었지만 그때의 에너지가 두고두고 기억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한 명 두 명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모이면 어떤 일을 하는지와 상관없이 '기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상관없이 '거리낌 없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인간으로서 '격이 없이' 놀았다.
뜬금없이 시간 되는 사람들에게 Ping을 보내고 만나서 즐겁게 이어지는 일. 서로가 서로를 모르지만 그들이 처음 만나 만들어내는 밝은 에너지
나의 한국 생활은 점점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들과 어울리며 많은 에너지를 받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들도 나도 모두 행복한 순간들을 많이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하지만, 모임의 에너지는 의도적으로 정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모임이 시작되기 전 그날그날 시간과 사정이 되는 사람들이 모이고 때로는 모두 서로를 처음 보는 관계일 때도 있기 때문에 모이기 전까지 어떤 분위기와 에너지의 모임이 전개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그 순간을 함께 '이어지는' 것부터 늘 모임은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는 한없이 느슨한 이 모임을 'Connecting'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더 자주 더 많이 이어지는 순간을 만들어가다
산동네에 홀로 사는 나는 어느 날 이불을 빨래하고 옥상에 널고 나서 파란 하늘과 기분 좋은 미풍, 펄럭이는 이불빨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졌다. 그리고, 그 행복한 기분으로 비공개형 커뮤니티 'Connecting' 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지금까지 이어져온 사람들을 커뮤니티로 초대하는 한편, 또한 이 모임을 만들게 된 동기의 시작점에 있던 친구에게 비공개 커뮤니티를 온라인상에 만들었음을 알렸다. 그는 도쿄에 살 때 어느 날 갑자기 좋아하던 디제이의 음악을 듣고 싶어 가게 되었던 어느 주택가 지하의 한 클럽에서 음악을 듣다가 우연한 기회로 통성명을 한 친구였다. 그 날 이후 우린 줄곧 '이어지는'순간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온라인 상에서의 'Connecting'이 시작되었다. 철저하게 비공개로 만든 이유는 공개된 SNS에서 발생하는 '소셜적인 압박감'(Peer Pressure)을 완전히 지양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이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보다 즐거운 순간들을 공유하고 얘기하는 모임을 가져보자가 취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마치 내가 그 날 빨래를 널고 미풍을 맞으며 파란 하늘을 보면서 행복해했던 그 감정처럼 행복한 순간들을 많이 이어나갔다.
온라인 공간을 만들고 나니 그때그때 Ping을 날려 모임을 만들 필요 없이 미리 공지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다소 준비가 필요할 것 같은 파티를 할 때도 미리 정리해 둘 수 있어서 수월했다.
가령 뜬금없이 성북동의 양옥주택을 통째로 빌리고 디제이 덱을 설치하고 음악을 틀어놓고 음식을 해 먹는다던가, 디자이너의 취향이 담긴 어느 호텔 스위트룸을 통째로 빌려서 새롭게 디자인하는 수준으로 룸을 바꾸고 덱을 설치하고 디제잉을 하고 기타를 치면서 밤새 논다던가, 옹기종기 모여서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가상체험 VR 헤드셋을 돌아가며 플레이한다던가, 자신이 평소 생각하는 사업 아이템을 그 순간에 이어진 사람들에게 피칭을 하고 즉석에서 의견을 듣는다던가. 모임의 목적도 형식도 즉흥적이었고 잡담(Small Talk)을 즐기면서 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 이 모든 모임에는 단 하나의 모임의 룰이 존재했다. '기꺼이', '거리낌 없이', '격이 없이' 시간을 내어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각자의 시간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나누어달라는 부탁 외에 준비를 요청하지 않는다.
(그래서 9년 가까운 시간 동안 늘 모임에 회비 공지도 없고, 무엇을 준비해와 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또한, Connecting의 모임에서 이어진 사람들과 별도로 소모임을 파거나 친밀해져 따로 모임을 가지는 것도 잦았다. '이어진'순간들에서 서로 공감을 하는 지점이 생기고 이를 통해 정서적인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들끼리 서로 모이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위적인 것보다 나은 '이어지지 않음'에 대해
한편으론 햇수를 거듭하고 '이어지는'순간들이 중첩될수록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번 나온 사람은 거리낌 없이 두 번째도 나오지만,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멤버들이 다른 멤버를 초대 가능하지만 주로 내가 초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위의 두 가지 이유로 멤버 간 '이어지는' 순간들의 '즉흥성'과 '거리낌 없음'이 점차 줄어들었다.
어느 날 누워서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했다. 우선 그동안의 시간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햇수가 거듭될수록 다양한 연령과 직업과 경험을 가진 삶의 사람들과 우연히 조우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좀 더 Connecting이 다채로워질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의 틀에 갇혀 내가 의식할 정도로 조급하고 인위적으로 '이어지는' 순간들을 만든 것은 아닐까. 스스럼없이 초대할 만큼 서로가 공유할만한 모임의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실패한 것은 아닐까.
뒤이어 몇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무의식'과 '즉흥성'.
의식하지 않은 채 무심결에 만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향하는 방향이 서로 행복한 그 순간을 이어간다는 의미로 보면 '즉흥적이지만 무의식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Connecting'의 순간이 있다면 당연히 'Disconnecting'도 있다는 것
원하지 않을 때 비동기화되어있는 개개인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가. 소셜 압박 (Peer Pressure)이 싫어서 비공개 커뮤니티로 만든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던가.
다시 일본에서 만났던 순간들로 돌아가 보았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의 스테이지가 어떤 상태인지 인식할 수 없었고, 다가오는 미래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방인의 삶으로서 하루를 인식할 뿐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한국에 돌아왔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Connecting'되는 순간들을 행복한 순간으로 인식했고, 별다른 기대를 가지거나 그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곤 몇 년 후 다시 'Disconnecting'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두 번째 이방인의 삶을 살아냈고 다시금 한국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겹겹이 쌓인 삶의 순간들 속에서 각자 어제와 다른 인생의 스테이지 속을 진행하고 있다. 나도 그랬고, 모두들 그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함께 있을 때 '행복한 순간'을 인식하고, 이어져 있지 않을 때는 각자의 삶 속으로 돌아갔다. 모두 다 다른 인생의 스테이지를 지내고 있다.
우리는 'Connected'의 상태가 아니라 '이어진 순간들'(Connecting)이 있었고 다시 그 순간을 위해 각자 'Disconnecting'되는 것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해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행복한 것보다는 '행복한' 상태가 자주 일어나는 것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는 단순함
생애 최초로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있다. 2017년 봄, 급격한 조직 변화와 인간관계의 변화를 통해 그동안 돌볼 새 없이 달려오던 나의 몸속의 생체시계가 동요되었던 것일까.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느낌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싶을 정도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일주일간 거의 매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니 만신창이가 된 몸과 흐리멍덩한 정신상태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병원을 찾았지만 인위적인 수면제 처방외에는 별달리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힘들었다.
햇볕을 많이 쬐고 많이 걸으면 좋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의사가 써준 진단서는 무거웠다. 휴가를 쓰고 아무 생각 없이 걷자는 마음으로 무작정 표만 끊고 가장 익숙한 외국이었던 일본에서도 가장 낯선 북해도를 골라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걷고 또 걸었다. 삿포로의 외곽으로 나가 구글맵 켜고 인가를 찍고 걸었다. 지도 위엔 녹색뿐이었고 드문드문 인가가 나왔다. 자연광 안에서 자연을 걸었다.
다리가 저리고, 신발 속 발바닥이 불타는 듯 뜨거워졌지만, 순간순간 행복함이 밀려왔다. 행복함이 밀려오는 순간은 Connecting 커뮤니티를 온라인에 만들기 전에 보던 그 빨래 널던 하늘과 닮아있었고, 밤늦게 숙소에 돌아오면 신기하게도 잠을 억지로 청하지 않고도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옥상에 올라가 다시 북동쪽 하늘을 보았다. 그냥 하늘을 바라보는데 행복했다. 그런데 '행복한 것' 이라기보단 '행복한 순간'이 내 일상 속에 또다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불면의 밤이 나를 침식하지 않았다.
'행복이라는 것'도 멈춰있는 게 아니라 살면서 마주치는 순간들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 없으니까 오늘 내키는 대로 다하자'가 아니라 '내일이 없다는 것은 모른다. 하지만, 행복하게 이어지는 순간을 만끽하자'가 Connecting의 모임에서 느끼고 싶은 것이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보통의 소모임이라면 목적과 의도에 맞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짚어볼 수 있다. 하지만, Connecting은 무엇을 PR 하기 위한 것도, 책을 같이 읽으면서 토론을 하는 것도, 각자의 취미를 공유하고 함께 즐기는 것도 아니었다. 보통의 소모임으로 가져야 하는 목적이나 의도가 없고, '그냥 즐겁게 순간을 이어보자'라는 취지만으론 소구 하거나 이해시키기 어려운 점은 분명 존재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 모임을 지지해주고 기꺼이 와준 분들에게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냥 느슨한 마음, 앞으로도 느슨한 마음
나는 이 모임이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고 구성원끼리 이해관계에 얽히는 것을 원한 적이 없다. 그냥 사람이 모여서 만드는 에너지가 좋았다. 그냥 에너지가 아니라 '선한'에너지였다. '선한'이라는 의미는 이타적인 생각이다. 내가 일본에서 주눅 들고 버벅거릴 때 내게 무얼 바라지 않고 손을 내밀어준 순간과 사람들처럼 이타적인 것 말이다. 그래서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고 거리낌 없이 격이 없이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사람들의 웃음과 행복함이 묻어 나오는 감정의 흐름 속에 있는 내가 힘을 얻은 것처럼 다른 이들도 힘이 필요할 때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또 하나는 짧은 글로 설명이 어렵지만 다양한 경험과 직업, 삶의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 격이 없이 어울리며 개개인마다 가진 경험의 확장을 통해 또 다른 행복한 감정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한때 탐독하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쓴 책을 읽다가 '아비투스'(habitus)의 차이로 인해 쉽사리 어떤 행동을 관습적으로 못하게 되는 어느 프랑스 지방의 풍습 관찰기를 읽었을 때부터 들었던 생각도 한 곳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구나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 어떤 사회적 층위와 기제가 있더라도 그것이 한계점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엔 전혀 못 느끼다가 살면서 점점 좁혀지는 인간관계와 문화적 관습에서 내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되묻던 시기가 있었는데 만약 내가 갑자기 일본에 나가 살지 않았다면 또한 그곳에서 이방인에게 선뜻 호의를 베풀고 자신들의 원 안으로 넣어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기는 하다.
거창하게 적기는 했지만, 사실 그냥 사람들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나의 믿음과 이를 반증해주던 Connecting의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그들과 또 언젠가 마음 편하게 느슨하게 이어질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대로 좋다.
느슨한 관계 속에서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행복한 순간들
그것으로 좋은 중년이다.
당신이 더 개방적이 될수록 그만큼 자신을 덜 속이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솔직한 피드백을 줄 확률이 더 높아지게 된다.
- 레이 달리오 <원칙> -
(점심시간 잡상 & 잡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