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 그 아름다운 이름 뒤에 숨은 것들

당신이 알고 있는 '효'는 정말 당신의 생각인가요?

by 세이지SEIJI

아름다운 이야기, 불편한 댓글

얼마 전 유튜브 쇼츠에서 인상적인 영상을 보았다. 야생에서 실명한 암사자 이야기였다. 앞을 볼 수 없는 어미를 두 딸 사자가 몇 년간 돌보았다. 함께 다니고, 먹이를 나누고, 길을 이끌었다. 어미 사자는 17년을 살다 떠났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런데 댓글창이 묘했다.

"이래서 딸이 있어야 해." "난 아들만 둘인데 어쩌지." "딸이 최고야." "자식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함?"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영상을 보았다. 노부부가 있었다. 아내가 반려견과 산책을 나갔는데, 15분이면 돌아오던 그녀가 한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수색하던 중 혼자 돌아다니는 개를 발견했고, 그 개를 따라갔더니 쓰러져 있는 할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역시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런데 댓글창은 또 비슷했다.

"아, 나도 반려동물을 키워야 하나." "나이 들면 반려견이랑 산책 나가는 게 안전하겠다."

나는 이 두 영상의 댓글들에서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쓸모로 환산되는 관계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딸 사자든, 반려견이든, 감동의 초점이 "누군가를 돌봐주었다"는 데 있다.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감동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이래서 딸이 있어야 해." "나도 반려동물 키워야겠다."

이 문장들의 행간에는 공통된 전제가 깔려 있다. 자녀든 반려동물이든, 내게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 나를 돌봐줄 존재, 나를 지켜줄 존재, 내 노년을 책임져줄 존재.

자녀를 갖지 않는 사람들에게 흔히 가해지는 말들을 떠올려보자.

"나중에 늙어서 외로우면 어쩌려고." "그러다가 독거노인으로 혼자 죽어." "평생 젊을 것 같아?"

이 말들의 본심은 무엇일까. 결국 노년을 위해 자식을 낳는다는 것이다. 내가 늙었을 때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런 돌봄이 없다면 이건 실패한 투자이자 손해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반려동물도 마찬가지다. 외로우니까, 남들이 다 키우니까, 귀여우니까, 집 지키는 용도로. 모든 관계의 출발점에 "나에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가 자리 잡고 있다.



빚을 지우는 구조

자식은 단 한 번도 부모에게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출산은 전적으로 부모의 결정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부모의 본능에 충실한 행위다.

모든 생물에게는 자신의 유전자를 존속시키려는 원초적 욕구가 있다. 그래서 자손을 낳는다.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운 행위에 도덕적 빚을 얹는 순간 생긴다.

"너를 낳아주고 키워줬으니 효도해야지."

이 문장은 흔하디흔하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이상하다. 자기가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낳아놓고, 그 결정에 대한 대가를 자녀에게 청구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선물을 주고는 "받았으니 갚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진짜 이타적인 부모라면 어떨까. 내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낳지 않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성적 욕구를 이기지 못해서, 피임이 귀찮아서,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혹은 노년이 외로울까 봐 자식을 낳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낳아놓고 빚을 지운다. 그리고 그 빚의 이름이 '효(孝)'다.



부모라고 다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뉴스를 보았다. 여당에서 '비속어 작명 금지' 법안을 발의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는 실제로 등록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천한놈. 계구리. 선풍기. 어드름. 고발해. 조까라.

이것들이 진짜 부모가 자녀에게 붙인 이름이다. 이런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면 굳이 법안까지 발의되었을까. 자녀 이름을 이런 식으로 짓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학대다.

우리 사회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무조건 숭고한 것으로 전제한다.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이며, 순수하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현실에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폭력과 학대로 점철된 부모-자녀 관계도 무수히 많다.

문제는 '효'라는 이름이 이런 일그러진 관계에서조차 족쇄가 된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학대받은 자녀가 그 관계에서 벗어나려 할 때, 사회는 말한다.

"그래도 부모잖아." "낳아주신 분인데." "피는 물보다 진해."

이 말들이 자녀를 파괴적인 관계에 가두어둔다. 효라는 도덕적 굴레가 탈출구를 막아버린다.



통치 도구로서의 효, 그리고 달라진 시대

효(孝) 사상을 강조한 대표적인 인물로 공자(孔子)가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보자. 춘추전국시대,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이다.

그 시대에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피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2차 성징이 지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원하는지 알기도 전에, 성관계와 출산이라는 과정을 겪었다. 수도승이 되어 일체의 성적 행위를 하지 않거나, 원래 불임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에게 출산은 통과의례였다.

이런 상황에서 '효'는 매우 효율적인 사회적 장치가 되었다. 국가가 노년 인구를 직접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자식이 부양하면 그만이고, 그러지 않는 자식에게는 윤리적 비난을 가하면 된다. 효는 통치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이 구조는 지금도 작동한다.

치매에 걸린 노부모를 부양하느라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자녀들이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 결혼을 포기하고, 인생 전체가 간병에 묻힌다. 사람들은 이를 보며 말한다.

"효자다." "효녀다." "참 착한 자식을 두었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자녀에게는 "불효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 반응이 가리는 것이 있다. "왜 이것을 개인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감탄과 비난으로 개인의 도덕 문제로 치환해버리면, 사회 시스템적 해결에서는 점점 멀어진다. 효라는 미덕이 복지의 공백을 메우는 데 동원되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다르다. 피임이 가능하다. 출산은 더 이상 통과의례가 아니라 선택이 되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제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가 아니라, 깊이 고민하고 준비한 끝에 내리는 결정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 존재를 오롯이 그 자체로 사랑할 준비가 되었을 때 부모가 될 수 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노후 대비'가 아니다. '쓸모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냥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사람이다.

그런 관계에서는 효를 억지로 강조할 필요가 없다. 진심으로 사랑받았다고 느끼는 자녀는 가르치지 않아도 부모를 공경한다. 효는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효'를 생각해보기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무조건 숭고하고 희생적이며 사랑으로 가득하다고 배워왔다. 효는 무조건 좋은 것이고, 효도하지 않는 것은 패륜이라고 주입받아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모든 부모가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은 아니다. 효라는 이름이 학대받는 자녀를 가두기도 한다. 효라는 미덕이 복지 시스템의 공백을 개인에게 떠넘기기도 한다. 자녀를 내 노후를 위한 투자로 보는 시선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

이 글은 "효를 버려라"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개념을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당신에게 '효'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 생각해서 얻은 답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주입받은 것인가.

주입된 고정관념 대신, 당신만의 효에 대한 견해가 생긴다면.

그것이 이 글이 바라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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