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될 수 없으니

가타카 후기

by 시즈

가타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가장 원하던 것 바로 옆에 서고서야 비로서 그것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라는 대사가 좋았다는 어느 추천 글이었다. 그 대사 만으로도 사람의 흥미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고 아무 것도 찾지 않고 유전자 조작되지 않은 인물의 도전기 정도로 생각하고 영화를 봤다.

영화에서 빈센트의 열망은 인상적인 것이었고, 나도 그를 응원하고 싶었던 것이 맞지만 사실 내가 영화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인물은 유진이었다.

나는 유진이 안타까웠다.

나 같기도 했고, 내가 안타까워서 답답하기까지 한 수 많은 주변 사람들 같기도 해서.

삶이 단 한 번의 실패로 모든 의미를 잃게 될까.

나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유진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던 것 같다.

삶이라는 긴 레이스에서 한 번 경로를 이탈하는 것은, 계획보다 많이 돌아가게 할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길에 들어서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로 삶을 포기할 이유가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 끝이 어디일지 우리는 알 수 없으니까 포기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이 실패했기 때문에 안쓰러운 것이 아니라,

실패를 겪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되는 그 자기만의 감옥을 쌓아가게 될 그의 시간이 무섭다.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겉모습밖에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실패란 잘 드러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실패를 딛고 성공하더라도,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실패는 수면 위로 나오지 않는다.

저마다의 실패를 알지 못하니 나의 실패만이 크게 와닿는 것 같다. 나의 실패만이 감각되기 때문일까.


유진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가보자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삶이 세워지는 기반은 인간의 선택의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사실같다.

법의 테두리 안에 있고, 혹여 살짝 넘어가더라도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나는 인간의 모든 선택을 저 두 가지 기준으로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스스로를 죽인다는 선택도 선택의 하나로 본다.

다만 말리고 싶은 선택, 이렇게나 멀리서도 안타까운 선택이 있다.

스스로를 고통으로 밀어넣는 선택이다. 정신적인 고통이든, 육체적인 고통이든.

유진의 가장 안타까운 선택은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유전자를 제공한다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선택이야말로, 스스로의 인생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밀어버리기 위한, 스스로를 고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그에게 빈센트가 어떤 의미가 되었든,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했든 어쨌든.

유진의 선택은 스스로를 벌주는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많이 울었다.

그에게 빈센트가 아무 의미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슬프다.

유진은 불확실성의 세계에서는 살아가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그 세계관의 희생양인 것이다.

그래서 유진에게 빈센트가 좋은 의미로 특별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과정과, 그에게 유진을 빌려주는 행위에 몰두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에게도 또 다른 살아가는 의미가 생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본 것 같아서 슬펐다.


또 이 영화에서 생각해볼 점.

가타카에서 유진을 그렇게나 몰아붙인 것은 오로지 유진일까.

나는 '완벽'이라는 허상을 신봉하는 어리석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너무나 연약해서, 사회의 거대한 격류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고작 개인이 그걸 이겨내기위해서는 얼마나 팔과 다리를 버둥거려야 하는지.

사람은 너무 연약하고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고, 영원불멸하지 않고 변하는 존재다.

변화하는 존재, 노화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완벽이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완벽했던 세포의 말로는 소멸 혹은 약화뿐이니까.

그 허상의 논리에 절여진 사회에서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추앙받고 또 내팽개쳐진 유진이 빈센트를 만나기 전까지 얼마나 정신이 부패하고 있었을지, 어떤 묘사가 없었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또 그 사회에 적응하며 살 수 있다고 믿었다가,

결국 우린 서로가 될 수 없는 남이고, 그는 하늘로 나는 이 휠체어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이 그를 어디까지 몰아붙일지 영화가 보여주지 않아도 누군가는 떠올렸을 엔딩일 것이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이 언제고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스스로가 보듬지 않으면, 우리의 가장 비어있는 결핍을 우리의 가장 아픈 상처를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좋겠지만

없다면, 적어도 스스로의 상처를 방치하거나 없는 척 켜켜이 껴입는 갑옷에 쓸리게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사회에 빈센트가 많아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유진이 없어지는 것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신이 되고 싶다는 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