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을 밥벌이로 시작한 지가 벌써 23년째이다. 교육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나이기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는 학생들을 드물게 보게된다. 가정적인 문제들로 인해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도 있겠지만 다수의 학생들이 학교의 적응의 어려움들인 교우관계, 성적 및 교사들의 차별적인 대우 등으로 학교를 떠나기도 한다.
특히 어른들의 눈에 보이지 않은 차별적인 대우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사는 학생들을 보면 내가 경험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에피소드가 오버랩되곤 한다. 누군가의 말한마디 생각없는 행동들이 청소년들의 삶의 여정을 찬란하게 밝힐 수도 수렁으로 빠지게 할 수도 있음을 나는 안다.
청소년 시절, 나는 소위 말하는‘놀기 좋아하는 학생’,‘뒷자리 성적으로 앞서는 학생들의 뒤치닥 거리 하는 학생’이었다. 내 삶 속에서 희망, 꿈이라는 단어는 생소한 단어들이었고 반에서 뒷자리 성적을 자처하면서 생각없이 놀았던 나의 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간자율학습이라는 것이 있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남아서 밤 10시까지 자기주도학습이라는 것을 해야했다. 공부도 하지 않은 내가 학교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남부시장에서 장사하시는 어머니를 돕는 것이 그 시절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반장으로부터 담임선생님이 병원 가셔서 일찍 퇴근하셨다는 말을 듣던 날, 나는
학교를 빠져나와 어머니가 장사하시는 남부시장으로 달려갔다. 나는 장사가 재미있었다. 시장사람들이 나의 장사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너는 커서 장사해야허겄구만’ 하시곤 하셨다. 내가 시장을 가는 날은 배추, 무를 포함한 엄마가 키운 채소들은 완판(完販)을 해서 빈 리어커를 타고 갈 수 있는 날이었다.
엄마의 장사 봉투가 두둑한 날에는 엄마는 막내오빠와 나를 남부시장의 값싸고 유명한 만두집을 데리고 가서 따뜻하고 연기가 모락모락 피워나는 찜통에서 꺼낸 고기만두를 사주시곤 했다. 어머니는 허겁지겁 만두 먹고 있는 나에게 항상 말씀하셨다.“ 막내아! 너는 공부해야한다. 엄마처럼 장사하면 안 된다.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친구랑도 친하게 지내고 말이여”나의 대답은 단순했다. “공부 못하면 장사하면 되지. 나는 장사하는게 재미있는데 공부보다도”
막내 오빠는 군대하기 전 엄마의 채소장사를 돕고 있었다. 내가 막내오빠에게 리어커 뒤에 타고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 “ 야! 너 몸무게를 생각해, 리어커 빵구나면 내일 채소 못 싣어”라면서도 리어커 뒷자리를 내주었다.
배도 부르고 편안한 리어커 뒷자리에 앉아 엄마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가는 날은 유난히도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이 있는 밤이었다. 전주천을 따라 집으로 가는 길에 흐르는 물소리는 하늘의 별빛과 함께 이중창의 노랫소리로 들렸다. 엄마와 함께 오빠가 끌어주는 리어커를 타고 별빛에 반사되는 황홀한 물소리를 듣는 찬란하게 별이 빛나는 밤에는 나도 미래의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1교시 시작 전에 반장이 나에게 교무실로 가보라고 하였다. 분명히 전날 저녁 야간자율학습을 빠지고 도망가서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을 예상했다. 나는 먹힐만한 답변을 속으로 준비했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생님들이 1교시 수업을 들어갈 준비를 하고 계셨다.
나는 담임선생님 책상 있는 쪽으로 다가가서 인사를 했다. 담임선생님은 어제 야간자율학습시간을 빠지고 어디 갔었는지 이유도 묻지 않고 단 한마디만 나에게 하셨다.
“ 넌 안되는 아이야!”
성적도 뒷자리에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가정형편도 녹록치 못했던 나는 희망이 없어보인다는 것을 나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담임선생님으로부터‘넌 안되는 아이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라는 아이는 정말 살만한 가치가 없고 희망이 없는 학생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 같았다. 나는 교무실에서 조용히 나와 운동장을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삼일 동안 나는 심한 열병을 앓았다. 어머니는 밥도 넘기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만 있는 나의 옆에 “ 막내야!! 친구한테 맞았냐?,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 시험 못 봤냐?”걱정만 하고 계셨다. 혼자 한숨을 쉬시면서“내가 무지해서 우리 딸이 고생하는구만, 내 탓이다. 내 탓이다” 하시면서 연신 가슴을 치셨다. 어머니는 누워만 있는 딸에게,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딸에게 희망을 주고 싶으셨는지 “막동아. 그만 일어나라. 학교 가지말고 엄마랑 시장가서 장사하자. 공부 좀 안하면 어띠어. 사람한테 공부보다 중요한 것이 많다이. ” 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남부시장으로 데리고 다니셨다.
이상하게도 학교를 가지 않고 엄마와 막내 오빠를 따라 남부시장 나가 장사해서 완판을 하고 빈 리어커 뒤에 앉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예전과 사뭇 달랐다.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이었고 똑같은 전주천의 물흐르는 노래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나의 마음 속에 찬란하게 별이 빛나는 밤은 아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난 학교로 돌아갔다.‘넌 안되는 아이야’라고 말한담임선생님에게 내가 잘 되는 것을 보여주어 복수하고 싶어서였는지, 자신을 탓하시는 어머니의 가슴치는 ‘쿵쿵’소리때문이었는지, 남부시장에서의 장사의 재미가 시들해서였는지.
돌이켜보면 누군가에게는 희망도 없고‘안되는 아이’였지만 나의 어머니에게는 나는 희망이었고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깨달았던 것 같다.
우리 인생에서 꽃이 피어서 봄이 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희망을 주는 말 한마디와 행동들로 봄들이 오는 것이리라. 누군가를 움직이는 것은 큰 것들이 아니라 ‘따뜻하고 배려있는 말 한마디’, ‘묵묵히 믿고 기다려주는 행동’ 같은 작은 것들이다. “넌 안되는 아이야!” 같은 절망의 소리가 아니라 희망의 외침을 주어 어려움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희망이라는 공명으로 울러퍼지게 해야한다.
밥딜런의 노래 가사처럼 자기가 뜻하고 꿈꾸는 대로 인생을 살아가기는 힘들다는 것을 청소년들도 잘 알고 있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들이 인생의 골목 모퉁이를 돌 때마다, 모래쌓인 길 위에서든, 험한 산 속에서든 희망을 주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인생의 길을 한걸음씩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을 주는 누군가가 나이기를, 우리들이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