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차례의 여름비가 내린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다. 겨울내 죽은 듯 하던 나무들도 어느새 푸른 초록잎으로 변신을 하고 있다. 때를 따라 꽃을 피워내고 숨겨놓았던 모습을 보이는 식물과 나무들을 보면 늘 감탄이 나온다. 인간들은 순간 순간의 삶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자연이 때를 따라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인간이 타인을 향해 보여지는 특별한 몸짓이 사랑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의 [꽃] 중에서 -
사랑이란 60조 억개의 인간의 세포를 깨워 단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인고의 행위이며 누군가로부터 나의 이름이 불러져 꽃이 되는 과정이다.
사랑을 하기 위한 사전 연습 과정이 나는 짝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사람만을 향한 개별화되고 특화된 마음이 짝사랑이다.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 삶의 의미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고 싶은 행위가 짝사랑이다. 짝사랑을 경험하고 타인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꽃이 되어 의미 있고 자신만의 빛깔을 가진 특별한 그 무엇이 된다.
짝사랑하면 생각나는 곳이 나에게는‘변산’이다. ‘변산’ 영화의 대사, 영화를 찍은 장소, 걸쭉한 사투리를 들을 때 나의 짝사랑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선명해지곤 한다. 이십 대 대학 시절 변산이라는 고유명사에서 나는 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었고, 짝사랑이라는 몸짓을 통해 누군가의 가슴에서 나는 작은 씨앗이 되고 싶었다.
벌써 20년이 넘는 이야기이다. 대학교 2학년 인문학부에 다니는 나의 절친 여자친구 Y가 나에게 대학 동아리‘하얀돌, 검은돌’ 가입을 권했다. '하얀돌, 검은돌'이라는 이름으로 바둑 동아리이구나 싶어 바둑도 배우기도 싶고 나의 절친 Y가 먼저 무엇을 같이하자고 한 것이 처음인 것 같아 거절하지 못했다. Y가 나를 이끌고 간 장소는 자연과학부 건물 2층 동아리 방이었다.
‘하얀돌, 검은돌’이라고 쓰인 동아리 방에는 남자 동아리 선배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Y가 동아리의 남자, 여자 선배 다섯 분에게 나를 소개했다. 모두 나를 환영해주면서 자신들이 앉은 자리를 내주었다. 바둑을 두고 계시는 선배들에게 " 바둑은 언제부터 배우나요?" 나는 물었다. 남자 선배 한 분이 " 바둑? 바둑은 왜 배우려고? “질문하신다. "바둑 배우는 동아리 아녜요?" 라는 말에 동아리 방의 모든 선배가 박장대소를 한다. 눈이 동그래진 나에게 선배 한 분이 " 하얀돌, 검은돌은 봉사동아리야. 어려운 보육원, 양로원 방문하고, 불우이웃 돕는 봉사동아리야"라고 설명해주신다.
' 바둑 배우는 동아리가 아니라니 !!.’ 이러면 동아리에 가입할 필요가 없을 듯싶다.
' Y야, 나는 바둑 배우고 싶어서 왔는데. 불우이웃 돕기 같은 봉사 동아리면 나는 가입 안 할래. 불우이웃인 내가 누구를 돕겠니” 귓속말로 동아리 방을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 순간 밖에서 남학생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람 뒤에 후광이 있다는 것을 동아리 방에 들어온 K를 보고 처음 깨달았다.
" 안녕하세요? 방금 수업 마치고 왔습니다. " 가지런한 하얀 이를 드러내는 K를 보자 공허했던 나의 마음에 ‘의미 있는 몸짓’이 훅하고 들어왔다. 여자 선배들은 "우리 동아리에서 제일 잘생긴 K가 왔네"하면서 반긴다. 수줍기로 소문난 내 친구 Y까지 먼저 인사한다. "K 왔어."
밖으로 나가려고 하던 나에게 K가 다정하게 말을 건다. "Y가 말했던 친구가 너구나. 환영한다. 우리 동아리에 들 거지? "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나가려던 문고리를 놓고 의자에 앉아버렸다. K가 가져다준 입회원서를 작성하고, 그날 이후, 나는 정체성이 불분명한‘하얀돌, 검은돌’ 동아리 선수가 되었다.
K라는 친구는 법학과 2학년이었으며 요즘 말로 ‘인싸’인 친구였다. K가 여자들에게 인기 있었던 것은 매너뿐만 아니라, 목소리가 여성들의 심금을 녹였다. 굵직하면서 약간 우렁찬 목소리로 K가 여자 동기들, 여자 선배들 이름을 부르면 ‘다들 K의 꽃’이 되고 싶어 했다.
동아리 입회원서를 쓴 날부터 무미건조했던 나의 일상은 경이와 환희로 가득 찬 축제로 바뀌었다. 어떤 노래 가사처럼 나의 일상은‘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내 모든 게 다 달라져졌어요.’가 되었다. 경영대학원 건물부터 자연과학부까지의 늘 보 다녔던 길, 늘 보았던 건물, 꽃과 나무들이 눈부시게 보였다.
‘하얀돌, 검은돌’ 동아리는 불우이웃을 돕기보다는 친목을 다지는 동아리인 듯싶었다. 바둑이 아닌 술 내기 오목을 선배들은 자주 두었고, 봉사보다는 부차적인 친목 도모, 남사친, 여사친 사귀기, 연애의 목적이 주를 이루는 동아리였다. 무늬만 봉사써클을 나는 K 가 있었기 때문에 다녔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동아리 M.T 계획이 세워졌다. 봉사써클 답게‘하얀돌, 검은돌’써클은 돈도 없었다. 굵직하게 취직 잘한 선배들이 적어서인지 M.T 장소는 변산으로 정해졌다. 3학년 남자선배 4명, 여자선배 3명, Y친구, K 남자동기, 몇 명의 남자동기 그리고 나까지 포함한 우리들은 변산으로 향했다. 고속버스와 시골버스를 타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변산의 어촌마을이었다.
작은 어촌마을 입구 터미널에 내리니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를 마중을 나오셨다.
K가 "어머니!" 하고 달려갔다. 알고 보니 우리들의 M.T. 장소는 K 남학생 동기의 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 좀 단정하게 입고 올걸’ 후회가 밀려왔다. K의 아버지는 변산에서 고깃배를 다수 가지고 계시는 어부셨고 마을에서 꽤 유지처럼 보였다. K 어머니는 우리를 환대해주셨다. 삼겹살부터 대오징어 구이를 포함한 먹거리, 우리가 준비한 알코올은 이십 대 젊음을 불태우기에 충분하였다. 모기향 역할의 모닥불 옆에 무늬만 봉사써클이었던 ‘하얀돌, 검은돌’멤버들은 K의 어머니가 담가놓은 복분자술, 개복숭아 술 항아리까지 거덜 내고 있었다.
알코올에 약한 나였지만 유독 그날만은 술에 취하지를 않았다. 이유는 정신이 말짱해야 했다. K의 동태를 살펴 K에게‘우리 한번 사귀어볼래’라고 고백해야 했기 때문이다. K가 집 뒤뜰로 가고 있는 것이 보여 나도 조금 후에 일어나 K 뒤를 따라갔다. 뒤뜰에서 K가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냥 들렸다. 내 절친 Y와 K의 이야기 소리이다.
�나랑 사귀어 볼래?" K가 Y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잘 모르겠어. Y의 대답이다. 나의 찐친 Y는 동아리 남자 선배님들의 로망이었고 K에게도 로망이었던 것 같다.
' 변산' 영화의 한 장면, 노래방에서 고등학교 때 학수(박정민 역)가 좋아한다고 고백하려던 사람이 선미(김고은 역)자신이 아니라 친구 미경이임을 알고 했던 말�내가 아닌가비어� 라는 말이 나의 입에서도 똑같이 나왔다. Y와 K의 대화를 듣고 조용히 내 자리로 돌아왔다. 머리가 멍해졌다.
K의 아버님이 내일 새벽에 고기배 탈 사람이 있으면 손들라고 했다. 머리가 멍해져 있던 나는 번쩍 들었다. K 아버님이“새벽에 고기 잡으러 갈 때는 여자는 배에 안 태운다.” 하셨다. 동아리 남자 선배들이 갑자기 이구동성으로�재는 여자 아니에요�하는 말에 다음날 나는 고깃배를 탈 수 있었다. 나의 짝사랑을 접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새벽 고깃배에 몸을 실었다.
K에 대한 짝사랑은 내가 심하게 앓은 몸살이었나보다. 새벽 고깃배에서 나는 이루지 못한 짝사랑에 대한 파편들을 토해냈다. 내가 토해낸 것은 전날 먹었던 것들과 내 안에 있던 짝사랑의 여운, 비밀, 상처, 집착, 자격지심까지 토해냈다.
변산 노을을 보며 해변에 모인 동아리 식구들과 함께 "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세상 사람들 하나둘 모여들더니/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라는 노래를 나는 목청껏 불렀다. 변산의 노을과 함께 대학 시절 나의 짝사랑도 노을처럼 사라져갔다.
슬프고도 치열했던 여름방학 동아리 M.T.후, 나는 대학 동아리 방에 더 이상 가지 않았다.
변산에서의 의미 있는 몸짓이었던 나의 짝사랑은 꽃이 피어나는 과정과 같이 좋은 땅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꽃을 피워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토양이 부족했었을까? 햇빛이 충분히 비치지 않아서였을까? 물을 너무 많이 주어서 그랬을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의 짝사랑은 두 사람의 은밀한 사랑이라는 꽃의 개화를 피워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짝사랑하는 동안 나는 누군가의 인격, 외모, 감정, 꿈, 희망, 타인에 대한 이해와 존경을 키울 수 있었다. 짝사랑을 사랑이라는 과정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누군가와 소통하는 법을 배웠고, 나와 전혀 다른 배경과 방식의 삶을 살아온 사람을 품는 법을 배웠다.
'변산' 영화의 주인공이 습작 노트에 썼던 글
-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너무 가난해서 자랑할 것이 노을밖에 없네 –
라는 글 밑에 변산에서 나의 의미 있는 몸짓에 대해 글을 써본다.
- 변산 앞 바다, 배 위에서 바라본 새벽녘, 사랑을 위한 의미 있는 몸짓은
가고, 아픔 너머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았네. -
오늘도, 어디에선가는 짝사랑, 찐 사랑, 방금 시작되는 사랑, 이별 등으로 인한 인간 존재의 몸살을 앓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변산 앞바다 지평선 위로 붉고 뜨겁게 떠오르는 태양 속에 인간이면 앓게 되는 그 무엇을 던져 태워버리세요 라고 말한다. 인간이면 가지게 되는 힘듬, 고뇌, 아픔, 갈등, 슬픔 등을 던지기 위해 우리 함께 떠나보자. 변산 앞바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