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건너 나성에 가는 길
동지들과의 작별과 다양한 변화 그리고 매서운 가르침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인지,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숙성/발효의 시간인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답 찾지 못한 채 ‘나는 누구인가?’,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는 건가?’를 묻고 또 물으며 시작한 2024년이었다. 회사 출장 덕분에 태어나 처음으로 미국에 가는 길 위에서, 지난 365일 525,600분을 본업(연구원) 이외의 경험 위주로 거칠게 되돌아보았다.
1월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들의 집단학습과 북한주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알리기 위한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미중갈등의 최전선이자 대한민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대만을 탐방하러 갔다. 장제스는 왜 마오쩌둥에게 패배했는가?를 곱씹으며, 금문도 최정상과 전역을 샅샅이 훑었다.
2월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그리고 고성균 장군님과 함께 <이게 안보여> 유튜브 채널을 론칭하고, 적지만 꾸준하게 영상을 제작했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미래 정보사회, 보다 안전하고 건강한 미래로의 대전환’을 연구하는 본업에 충실히! 회사에서 감사한 기회를 주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 3대 ICT박람회 모바일월드콩그래스 MWC2024를 관람했다. 이어서 프랑스 보르도를 탐방하며 중소도시가 어떻게 한 가지 산업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지를 살펴봤다.
3월
꽃이 피고 봄이 왔다. 다음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호밀밭출판사에서 <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 7쇄 인쇄를 앞두고, 이참에 개정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원작에 미처 담지 못한 부분도 살짝 채우고, 그간 탐방하며 찍은 생생한 현장사진들을 넣고 싶었다. 도전을 결심하고 퇴근 이후 자투리 시간과 남은 체력을 쏟아부으며 작업했다. 허나 쉽게 볼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책을 출판하는 것과 비슷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만 했다.
4월
태재연구재단에 2년 계약직으로 입사했는데,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리고 꼭 가보고 싶었던 일본의 나가사키로 짧은 탐방을 갔다. 일본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 입국심사를 하는데 재개정판 표지 디자인이 도착하고, 바로 그 순간에 쇼인 연구와 탐방의 추억을 간직한 진짜돌 스승님의 연락이 왔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뭔가 우주의 에너지(?)가 모이는 듯 했다. 일본이 서구의 근대문물을 흡수하며 근대산업화의 기반을 다졌던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 폭심지도 답사하고, 그곳에서 사그라진 수많은 한국인들을 위해 절을 올렸다. 그리고 비바람 몰아치는 가운데 사카모토 료마의 근거지(가에야마 샤추)에 올라가 그의 삶을 흠뻑 느껴보고자 했다.
5월
1일 육군3사관학교에서의 강연으로 시작하고, 31일 경희대 국제학군단에서의 강연으로 마무리했던 한 달이다. 어느날 퇴근 이후 군 원로들께서 모여만든 서울안보포럼 기획회의에서, 현역 간부들의 처우/복무여건 개선이 너무나 절실하고 긴급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제발 전우들의 전규를 들어주십사.. 눈치 안 보고 날 것 그대로 말씀드렸는데, 감사하게도 서울안보포럼의 정례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6월
존경하고 애정하는 해병대 이주은 예)대위, 군 복무중 부상제대군인들 그리고 감사한 인연들 덕분에 서울시장님과 함께 유튜브 방송을 찍게 됐다. 군 간부들의 처우개선에 경각심을 갖고 정책적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렸고 경청해주셨다. 육군사관학교총동창회에서 장교양성기관 총동문회들과 함께 기획한 세미나에서 토론자로서 발언기회를 얻어 같은 논조로 선배전우 모두의 각성과 전폭적인 관심/지원을 촉구했다. 월간지 ‘신동아’에서 고성균 장군님과 함께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강원도 양구 모 사단 훈련병의 안타까운... 순직사건과 군의 미래 등에 대해 나눈 담화가 8월호 잡지에 실렸다.
7월
모교인 선정고등학교에서 고등학생들에게 진로강연을 했다. 친구들, 선생님들과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헤르만 헤세의 글 제목처럼 ‘그리움이 나를 밀고간다’
8월
2년 넘게 거의 개근해 온 수영을 여느 때처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양쪽 어깨가 너무 아파왔다. 조금 쉬면 낫는 거 같아 두세달 꾹 참으며 전투적으로 계속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순간이 찾아와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엑스레이, 초음파를 찍더니 회전근개를 다쳤다며 ‘6개월 수영금지’라는 충격적인 지시를 내리셨다.. 동네 수영대회에도 출전하지 못하게 됐고, 어깨를 팍팍 돌리며 헤엄치시는 같은 반 회원님들이 그저 부러웠다. 걷다가 뒤틀렸던 발목은 잘 낫지 않아 러닝은 엄두도 못 내고 몸도 마음도 무거운 채로 보낸 시간이었다.
한창 뜨거운 어느 날, 모 전우님들께서 멀리서 찾아와주셨고 과분한 선물을 주셨다. 그들과의 동행은 큰 힘이 된다. 또한 고마운 동기생 덕분에 동북아시아 군사분쟁과 전쟁 억제의 핵심인 평택 험프리기지를 답사할 수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만 봐도 ‘미군’을 적으로 두고 있는 세력이 느낄 물적/심적 부담은 얼마나 클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오랜 친구, 수파킷 중령과 그 가족을 만났다. 딸바보가 되어 행복해하는 친구를 보며, ‘아 나도 아빠가 나를 낳았던 나이가 되었구나’를 실감했다.
9월
쉼없는 한 달이었다. 주말마다 간호, 공군, 육군, 해군사관학교 수험생들을 가르쳤다. 우리 사회의 평화와 안보를 책임지고자 결심하고 도전하는 학생들의 열정은 햇볕보다 더 뜨거웠다. 나를 믿고 찾아와 준 그들과 호흡하며 내 스스로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 각군 사관학교 입교해 한 학년씩 성장해나가는, 혹은 더 적합한 진로를 찾아 도전하는 모습은 언제나 감격스럽다. 무한응원을 보낸다.
2년 전 추석 연휴 때 영산강-섬진강을 자전거로 종주했는데 이번엔 금강을 종주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4대강을 종주하는데 성공했다. 언젠가 평양 대동강과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등을 종주하는 꿈을 꾼다. 군사전문서점 워랩에서의 세미나를 통해 다케다 신겐 가문의 후예인 주한 일본국방무관도 만날 수 있었다. 대한민국 광복회에서는 국군의 날을 앞두고 “한국군의 뿌리는 무엇인가”라는 학술토론을 열었고 불러주셨다. 특정 이념과 사관에 치우치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주장을 펼치려고 했다.
10월
국군의 날을 맞아 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발행하는 10월 특집호에 우리 군의 정체성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감사하게도 가장 앞에 실어주셨다. 그리고 2년 연속 진행된 대규모 시가행진을 보았다. 위용을 드러내는 행사도 좋지만 군 장병들과 그 가족들의 처우와 복무/생활여건 개선에도 제발 예산을 확보해야 할텐데..! 계룡대에서 열린 첫 카덱스 전시에 찾아가 K방산을 관찰했다. 그리고 국방홍보원에서 주관하는 전우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부상장병들을 위한 공익법인 ‘퍼플하트’의 이름으로 함께 달렸다. 북한군 지뢰에 발목아랫부분이 사라졌는데도 5km를 완주한 이주은을 보며 감격스러웠다.
11월
2024년은 전 세계 70여개 국가에서 선거가 펼쳐진 한 해다. 세계와 세기가 주목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그런데 그 전까지 한국 언론과 지식인들은 ‘해리스’가 유리하거나 박빙인 것 마냥 보도하고 주장을 펼쳤다. 한국 사회가 어딘가에 경도/편향되어 있거나 색안경을 쓰고 선입관을 갖고 있다는 방증일까?
국회 부승찬 의원실에서 주관한 국군조직법 개정안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포스터에 미군의 실루엣과 장비를 그려놓고는 한국군의 뿌리를 논하고 있는 현실, 육군을 친일로 규정하는 행태, 수많은 독립영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5명’에게만 매몰되는 현상 등을 비판하고 나의 주장을 전개했다. 광복군유족회 이사장님 등께서 깊이 공감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조금 놀랐다. 대한민국ROTC총동문회에서는 주제발표 기회를 주셔서 학군단의 발전을 위한 나름의 주장을 전개했다.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코흘리개 시절에 봤었던 여러 인연들과 재회해서 반갑고 감사했다.
2학년 기수생도 시절 같은 층에 살았던 한 선배의 충격적인 살인사건에 경악했다. 경악, 엄중한 수사와 처벌,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조의를 담아 유튜브 커뮤니티에 올린 글이 언론기사화되며 곳곳에서 연락왔다. 지상파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의 인터뷰 요청이 왔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극악무도한 사건에 더 보탤 말도 없었다.
12월
영광스럽게도, 서울특별시 명예시장으로 위촉됐다. 분야는 ‘청년보훈’으로 우리 공동체를 위해 땀 흘리고 있는 제복입은 영웅들, 군인/경찰/소방/공무원 등의 명예와 처우개선을 위해 정책을 발굴하고 목소리 내고자 다짐했다. 선후배동료들께서 많은 축하와 격려를 보내주셔서 감사했다. 그런데 그날 밤 10시 30분, 격앙된 모습의 군통수권자가 생방송에 출연했다. 모든 이슈가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갔다. 나는 우리 군이 다시는 국내정쟁에 개입해서도 안 되고, 개입시켜도 안 된다고 생각해왔다. 군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정치권력도 군의 중립성을 보호해야만 한다. 그래서 대통령의 독단적이고 뜬금없는 결정, 군인과 국민을 배신하는 결정에 반대했다.
이 때부터 대한민국 사회는 전례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거의 다 성사됐던 군 간부 처우/복무여건 개선도 순식간에 물건너갔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정치투쟁이 펼쳐진다. 거대야당의 연쇄탄핵(협박)에 이어 남탓, 대립, 반목, 불신, 혐오, 증오, 광기의 언어가 넘쳐난다. 언젠가 시간을 두고 찾아왔을 문제들이 마치 시계태엽 감듯이 한 번에 앞당겨진 걸까, 6공화국 헌법구조의 한계일까,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일까, 아니면 한국인들이 마주할 수 밖에 없던 숙명인 걸까. 한 책의 제목인 ‘소용돌이의 한국정치’가 떠오른다.
한편, 이 사태의 전중후와 의사결정/실행 과정에서 육사 선배들이 워낙 많이 등장했던 것 때문일까. 내게 몇몇 신문과 방송에서 기고, 인터뷰 등을 의뢰해주셨는데 모두 정중하게 거절했다. 상황 자체가 워낙 당혹스럽기도 하고,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 채로 당장 보탤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모르는 데 아는 척하는 건 사기이기 때문이다.(대외적 소통은 거절드렸지만 상황이 정리된 뒤에 뜻있는 분들과 함께, 미력하나마 이번 사태와 일련의 과정을 총체적으로 징비하고 혁신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선을 아주 쎄게 넘는 요청도 몇몇 있어 당혹스러웠다. 언론이 균형과 중심을 잃지 않고 저널리즘의 정신을 굳건히 발전시키길 응원할 뿐이다..
첩첩산중이라 했던가, 2024년 마지막 주말에 너무나 가슴 아픈 참사가 발생했다. 뉴스를 보면서 손이 덜덜 떨리고 말이 안 나왔다. 희생자들과 유가족분들의 아픔과 충격을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안타까운 소식들이 가중되는 와중에, 마지막 날 6년을 지낸 둥지를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로 거처를 옮겼다.
12월은 사회도 몸도 마음도 아픈 시간이었다. 마음의 아픔이 몸에도 그대로 드러났던 건지, 양쪽 눈은 각결막염으로 시뻘개지고 몸살에 감기에 끙끙 앓았다. 연말 모임도 거의 못 갔다. 내가 나고 자라온 이 사회가 앞으로 더 살기좋은 곳이 되길 바라건만, 혼란이 끊이질 않으니 착잡하다. 사실 인류사회 전체의 지속불가능성이 악화되고 있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흐른다. 역사는 흘러가듯 간다. 이보다 더 힘들고 거친 시대를 살아낸 선조들도 있지 않던가. 구름 위에는 언제나 파란 하늘이 있지 않던가! 열정을 갖고 도전하는 꿈나무들, 타들어가는 속을 부여잡고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선후배동료들, 무럭무럭 자라나는 조카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며 힘을 내어본다.
2025년은 을사조약 120년, 식민지에서의 해방 80년, 6.25전정의 발발 75년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고 중대한 기점이 될 것 같다. 얼마 전 알게 된 사실, 존경하는 ‘김홍일’ 장군님의 생일이 1898년 9월 23일로 내 생일 1988년 9월 23일과 숫자 위치 하나만 다르다. (억지로 끼워맞추기지만) 내 삶에도 나름의 주어진 소명과 뜻이 있을테고, 그것을 부단히 탐색하며 좌고우면하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게 내가 살아내야 하는 삶일 듯 하다. 이미 시작된 2025년, 이제까지처럼 “나는 누구인가?”라는 답 없는 질문을 붙들고 하루하루 나아가보고자 한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과 행복 가득한 한 해 보내시길 응원드립니다. 대한민국에도, 세상에도 보다 안전하고 건강한 미래가 오길 바랄 뿐!
- 태평양 건너 나성에 가는 하늘길에서 지난 한 해를 갈무리 지으며, 코리아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