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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Aug 29. 2024

조선의 이단아, 허균의 식탐일기

'도문대작' 속 옛 식재료를 찾아서 

조선시대 풍속 중에는 TV 사극의 영향으로 잘못 알려진 정보가 적지 않다. 한 예로 죄인이 유배를 갈 때는 풀어헤친 상투에 소달구지를 타는데, 이는 사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의 모습이다. 유배 가는 죄인을 굳이 ‘모셔다 줄’ 이유는 없는지라 보통은 자비를 들여 이동했고, 그 와중에 여비로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유배생활이 고난의 연속이었던 까닭은 주거가 제한된다는 것 외에도 경제적 어려움 탓이 컸다. 곧 복직이 예상되는 고위직이라면 유배지 지방관 등이 나서 먹고 입는 것을 살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죄인들은 열악한 생활환경, 특히 부족한 식량 때문에 고생을 겪었다. 추사 김정희도 유배 중 본가에 서한을 보내 찬거리를 보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한 기록이 남아있다. ‘홍길동전’의 허균은 한술 더 떠, 과거 맛본 전국의 맛있는 음식들을 상상하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조선의 미슐랭 가이드라고도 불리는 ‘도문대작’이다.       

‘조선시대 문제적 인물 1위’로 자주 거론되는 허균은 적서차별에 반대한 것 외에도 하층민으로 취급받은 승려들과 교류하는 등 주류 양반사회에서 여러모로 ‘튀는’ 행보로 눈총을 받았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지니고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뜻을 펴지 못한 누이 허난설헌, 동인의 영수로 율곡 이이와 대척점에 섰던 부친 허엽 등 그의 일가는 평범하지 않은 면모가 강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삶도 하나같이 순탄치 못했고, 허균 본인이 역모로 거열형을 당하면서 가문이 풍비박산난다.      


다만 집안이 애초에 명문가였던데다, 부유한 집안에 장가든 허균은 어려서부터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아버지 허엽은 딸 난설헌의 재주를 아끼는가 하면 직접 바닷물로 두부 만드는 방법을 개발할 만큼 양반 체면을 앞세우지 않는 소탈한 성품을 가졌던 것 같다. 그의 호 ‘초당’은 오늘날 순두부 마을로 유명한 강릉시 초당동이라는 지명에 남아 있다.      


“우리집은 가난하기는 했지만 선친이 생존해 계실 적 사방에서 나는 별미를 예물로 바치는 자가 많아 나는 어릴 때 온갖 진귀한 음식을 고루 먹을 수 있었다. 커서는 잘사는 집에 장가들어서 산해진미를 다 맛볼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병화를 피해 북쪽으로 갔다가 강릉으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기이한 해산물을 골고루 맛보았고 벼슬길에 나선 뒤로는 남북으로 전전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별미를 모두 먹어볼 수 있었다.”는 것이 허균 본인이 밝힌 미식가가 된 과정이다.      


특히 그는 “먹는 것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이다. 더구나 먹는 것은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다. 선현들이, 먹는 것을 바치는 자를 천하게 여겼지만, 그것은 먹는 것만을 탐하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지적한 것이지 어떻게 먹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것이겠는가”라고 강조했다. 당시 양반들은 선비가 음식에 대해 논하는 것을 천하게 여겨 금기시했다. 허균의 이런 주장에서 과연 시대의 이단아다운 면모가 드러난다.     


방송을 통해 재현된 유배지 밥상

일찍이 조정에 출사해 여러 관직을 거치던 그는 43세때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시관이 됐다가 비리에 연루됐다. 조카와 조카사위를 부정한 방법으로 합격시켰다는 것이다. 유배를 가게 된 허균은 지금의 전북 익산, 함열로 향했는데 이곳에 가기 위해 여러모로 청탁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유는 그가 좋아하는 방어와 준치가 맛있기로 이름난 곳이기 때문.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쌀겨조차 부족했고, 썩어가는 생선에 나물 반찬 뿐이었다. 그것도 하루 두 끼밖에 먹지 못해 종일 배고픔에 시달렸다고 한다.      


결국 그는 잘 나가던 시절의 산해진미를 떠올리며 마음을 달랬고, 전국의 맛있는 음식을 집대성한 ‘도문대작’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이 곤궁한 처지에 놓이면 아무래도 친숙한 고향 음식을 먼저 찾게 마련인데 허균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고향 강릉의 방풍죽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나의 외가는 강릉이다. 그곳에는 방풍이 많이 난다. 2월이면 그곳 사람들은 해가 뜨기 전에 이슬을 맞으며 처음 돋아난 싹을 딴다. 곱게 찧은 쌀로 죽을 끓이는데, 반쯤 익었을 때 방풍 싹을 넣는다. 다 끓으면 찬 사기그릇에 담아 뜨뜻할 때 먹는데 달콤한 향기가 입에 가득하여 3일 동안은 가시지 않는다. 세속에서는 참으로 상품의 진미이다. 나는 뒤에 요산(지금의 황해북도 수안군)에 있을 때 시험삼아 한 번 끓여 먹어 보았더니 강릉에서 먹던 맛과는 어림도 없었다.”고 레시피와 맛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지금 현대인들이 읽어도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실감이 난다.      

갯방풍

다만 죽의 재료인 ‘강릉 방풍’은 오늘날 시중에 흔히 판매되는 나물과는 다른 종류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방풍나물은 전남 여수 금오도에서 80%가 생산된다. 즉, 남쪽 지역에서 흔하며 비교적 날씨가 추운 강원도 동해안에서는 보기 힘들었다. 허균이 말한 방풍은 ‘갯방풍(해방풍)’으로 전혀 다른 식물이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자라는데 이름이 비슷한데다 둘다 한약재로 쓰이다 보니 혼동하게 되는 듯하다. 갯방풍은 민트처럼 화한 향이 입안에 퍼진다고 한다.     


금강산 여행 때 표훈사 주지가 대접했다는 석용병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다. 도문대작에는 “주지가 밥상을 차렸는데, 떡 한 그릇이 있었다. 이것은 구맥(瞿麥)을 곱게 빻아 체로 아주 많이 친 다음에 꿀물과 석이를 함께 뒤섞어 놋쇠시루에 찐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 내용만 보아서는 어떤 음식인지 떠올리기 힘든데 후대 ‘증보산림경제’를 저술한 유중림은 구맥이 귀리를 가리키는 이맥(耳麥)을 잘못 쓴 것으로 봤다. 구맥은 술패랭이꽃의 이명으로 곡물이 아니라 떡을 만들 수 없다. 석이병은 장계향의 ‘음식디미방’ 등에도 나오는데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귀리를 빻고 석이와 꿀물을 넣어 반죽해 찌는 것이 일반적이다.      


석이는 ‘석이버섯’이라고 흔히 부르지만 사실은 바위에 붙어 자라는 지의류의 일종이다. 잔칫상 요리에 고명으로 올라가는 귀한 재료였는데, 다소 습한 날 채취하기 편하다 보니 바위에 미끄러져 낙상사고가 잦았다고 한다. 매월당 김시습은 석이에 대해 “볶은 석이가 마치 고기를 먹은 듯하고, 먹고 나니 마음이 시원하다”는 시를 남겼다. 석이병 맛에 대해 허균은 “두텁떡이나 감떡보다 훨씬 맛있다”고 했는데 두 종류 모두 서울의 부유층이 즐기던 떡이었다.      

석이를 올린 떡

과일을 묘사한 부분을 보면 오늘날 보기 힘든 이름들이 많이 나온다. 천사리(天賜梨)라는 배는 성종 무렵인 15세기 중반 강릉에 살던 진사 김영의 집에서 처음 열린 배나무로, 열매가 사발만하고 맛이 연하다고 했다. 그 외에 금색배, 붉은배, 대숙배 등 다양한 종류가 언급된다. 감귤류 과일로는 금귤, 감귤, 청귤, 유감, 감자 등이 나오며 거의 대부분 제주산이라고 밝혔다. 당시만 해도 귤은 육지에서 거의 맛보기 힘든 귀한 과일로, 세종대왕이 진상받은 귤을 몰래 감춰뒀다가 아끼는 후궁에게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들쭉’이라는 이름의 과일도 나오는데 2000년 남북정상회담 만찬 때 나온 ‘들쭉술’의 재료이며 모양과 맛이 블루베리와 비슷하다.  

   

궁궐 수라상에 올랐던 귀한 식재료들도 있다. 연산군이 찾았다는 사슴꼬리, 사슴 혀, 표범의 태, 곰발바닥인 웅장 등이다. 오늘날에는 식용이 금지된 웅장은 털을 제거하고 며칠동안 푹 고아야 먹을 수 있었다. 중국 전국시대 고사에는 초나라 성왕이 반란을 일으킨 아들에게 마지막 소원으로 곰발바닥 요리를 먹고 싶다고 했으나 아들 상신은 이를 무시하고 자결을 강요한다. 곰발바닥 요리가 완성되는 동안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겠다는 아버지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다.      


도문대작에 언급되는 음식들은 대부분 허균이 관직생활을 했던 서울과 고향이 있는 강릉에서 나는 것들이다. 다만 의외로 명나라와의 국경지대인 의주의 음식들도 다수 나온다. 1594년 허균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 종사관을 맡아 4개월간 의주에 체류했다. 대만두와 거위구이, 황화채(원추리) 등은 모두 중국인들이 오늘날까지 즐겨 먹는 음식들이다. 간접적으로나마 국경 밖의 미식을 접하는 경험도 한 셈이다. 그 중에서도 허균은 맛의 고장 전라도의 음식을 높이 평가했다. 전남 부안에서 허균이 꼽은 명품 식재료는 사슴꼬리와 오징어, 민물새우인 도하 등이 있다.      

중국의 곰발바닥 요리

조선시대에는 대규모로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기가 어려웠다. 지금처럼 특정 식재료를 대량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대신 그 종류만큼은 무궁무진했다. 수백 년 전 문헌인 ‘도문대작’에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등장하는 것도,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먹을 것을 찾아내려는 당시 사람들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다. 오늘날 우리는 마트에서 쉽게 고기와 채소를 살 수 있지만 식재료 선택의 폭은 크게 줄어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한편 도문대작을 쓴 직후인 1611년 음력 11월, 허균은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광해군의 신임을 받고 승승장구하지만 인목대비 암살시도 사건으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가문이 몰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아낸 그는 ‘도문대작’ 서문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지었다.      


“먹는 것에 너무 사치하고 절약할 줄 모르는 세속의 영달한 사람들에게 부귀영화는 이처럼 무상할 뿐이라는 것을 경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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