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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속 맛 이야기

가마쿠라의 뜨거운 햇살을 그리며

by Sejin Jeung
XL.jpeg 사진출처 yes24

지금의 배우자와 연애를 시작할 무렵 함께 본 영화가 '바닷마을 다이어리'였다. 가마쿠라와 에노시마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된 우리는 언젠가 영화 촬영지를 찾아가자고 했다. 그리고 이듬해 늦은 여름, 드디어 그곳을 함께 방문했다. 뜨겁고 강렬한 햇살의 온기와 시원한 바닷바람, 중세 일본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국적인 풍경에 젖어든 시간이었다.


'츠바키 문구점'을 읽으면서 나는 그 시절의 달달한 추억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고풍스러운 가마쿠라의 사찰과 커다란 불상, 에노덴 전차, 유난히 짙고 검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주인공 포포는 이런 동화 속 같은 소도시 변두리에 살고 있다. '선대'라고 부르는 할머니의 사망 후 그녀가 운영하던 츠바키 문구점을 이어받아 사장이 됐다. 하지만 포포에게는 또 다른 직업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가.


11대째 가업을 잇는 포포는 어린 시절 혹독한 할머니의 수련에 어느 순간 괴로움을 느끼고 방황한다. 오랜 시간 외국을 떠돌다 결국 처음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 그녀는 그간 교류가 없었던 마을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마음 속 빈 공간을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옆집에 사는 바바라 부인과 꼰대 같지만 반전매력을 가진 남작 할아버지, 학창시절 친구 등이 차례로 포포를 찾아온다.

728166075869961.jpeg 2016년 방문한 가마쿠라 주택가 풍경
728165094054665.jpeg 에노시마로 향하는 교각

그리고 손편지를 부탁하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사연이 펼쳐진다. 결혼식에 와준 지인들에게 이혼 소식을 알리거나, 이웃 사람과 생긴 오해를 해명하거나, 혹은 돈 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하는 등 여러모로 까다로운 사연들이다. 그때마다 포포는 고심해서 내용을 구상하고 공들여 필기구와 편지지 등을 고른다. 필기구 덕후라면 빠져들 정도로 세심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나는 문구류에 대한 지식이 많지는 않지만, 책을 읽으며 오래 전 베네치아 노점에서 팔고 있던 깃펜 기념품이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일본인들이 오늘날까지도 까다롭게 형식을 중시하는 문화를 읽을 수 있어 '참 피곤하겠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일본의 소규모 공동체 마을이라면 대필가라는 직업이 여전히 존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포포의 할머니는 대필의 역할을 '제과점 과자'에 비유한다.


“자기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어도, 제과점에서 열심히 골라 산 과자에서 마음은 담겨 있어. 대필도 마찬가지야. 자기 마음을 술술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문제없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해 대필을 하는 거야. 그편이 더 마음이 잘 전해지기 때문이지"라는 문장을 읽으면 확실히 납득이 된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재미 포인트는 곳곳에 등장하는 '먹방'이다. 작가 오가와 이토는 전작 '달팽이 식당'에서처럼 맛깔나는 음식 묘사를 늘어놓는다. 남작이 포포에게 포상으로 대접하는 식사는 간단한 이탈리아 요리와 장어덮밥이다. 게 내장인 가니미소로 만든 바냐카우다는 읽으면서 군침이 도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결국 마트에서 파는 통조림을 사왔다. 멸치 튀김 안주는 시칠리아 여행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728165600585480.jpeg 시라스와 마구로 타르타르, 온천계란을 올린 덮밥
728165597536521.jpeg 시라스 텐동
728165580601353.jpeg 전갱이회
728165567786505.jpeg 생강간장 시라스

가마쿠라 특산물인 시라스도 당연히 등장한다. 현지의 식당에 가면 거의 모든 메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라스 요리를 흔히 맛볼 수 있다. 실처럼 가느다란 치어를 밥에 듬뿍 올린 돈부리가 대표적이다. 그밖에도 시라스 튀김, '바닷마을 다이어리'에도 나온 시라스 샌드위치, 꿈틀거리는 시라스 회에 생강즙과 간장을 뿌려 먹는 음식도 있다.


에피타이저를 즐긴 후 남작은 포포에게 '2세대 주택'이라고 부르는 2단 장어 덮밥을 주문한다. 식전 맥주안주로 간볶음도 나온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매운 숯불연기, 달콤짭짤한 양념 맛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하다. 우리나라 장어집에 가면 뼈튀김은 자주 나오지만 간볶음이나 키모스이(장어 간 국)는 보기 힘든게 아쉽다. 아무튼 거한 식사를 얻어먹으며 포포는 자신의 과거와 할머니의 숨겨진 사연도 알게 된다.


오가와 이토의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보이는, 특유의 오글거림은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주인공의 행동을 납득할만한 설명이 생략돼 몰입을 방해하는 면도 있다. (사실 이런 점은 '리틀 포레스트' 같은 일본 문화콘텐츠 전반에 보이는 현상이다.) 하지만 가마쿠라라는 고장에 추억을 가진 나로서는 힐링을 받을 수 있었고, 필기구의 세계를 탐색하는 즐거움만으로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728166100200968.jpeg 가마쿠라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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