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성악가의 못말리는 고향음식 사랑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불리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클래식 음악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가 부른 오페라 투란도트 속 ‘네순 도르마(Nessun Dorma: 아무도 잠들지 못하리)’는 귀에 익숙할 것이다.
사망한 지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파바로티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익숙한 이유는 빼어난 고음과 풍성한 성량 외에도 친근한 인간미로 소탈한 행보를 이어간 데 있다. 특히 먹는 것에 진심이라는 이탈리아인답게 그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간에 규칙적으로 중단하고, 먹기에 열중해야 한다는 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본인의 몸이 곧 악기와 같은 성악가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체격 유지가 필요하다. 특히 공연 직전에는 에너지 소모에 대비해 든든하게 속을 채우는 경우가 많다. 파바로티가 가장 사랑한 음식은 고향인 북부 이탈리아 모데나의 로컬 요리들이다. 성악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글로벌 투어를 할 때도 그는 이탈리아 음식을 챙겨 먹으며 기운을 얻었다고 한다.
호텔에 머물 때는 반드시 미니바가 아닌 대형 냉장고와 각종 식재료,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의 냉장고 안에는 20명은 넉넉히 먹을 식재료가 있었는데 항상 준비돼 있어야 할 재료는 닭고기, 파스타, 이탈리안 토마토 등이다. 1980년대 중국 투어를 할 때는 제노바의 한 레스토랑에서 두 사람의 셰프를 동반하기까지 했다.
북부 이탈리아는 남부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족하다 보니 고기, 치즈, 크림 같은 고열량 재료들을 많이 사용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식재료로 알려진 트러플이 주로 나는 고장도 북부의 피아몬테 지방이다. ‘파마산 치즈’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도 모데나와 인접한 파르마 지방에서 생산한다. 커다란 북처럼 생긴 이 치즈는 내부를 파내고 화이트 와인을 부은 다음 파스타 같은 재료를 넣는 퍼포먼스용으로도 유명하다.
파바로티의 고향 모데나는 와인을 숙성시킨 발사믹 식초가 태어난 곳이다. 고대 로마 시절부터 와인은 식생활의 필수품이었는데 다양한 와인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종종 포도가 지나치게 발효되는 일이 있었다. 낮은 도수의 술은 오래 방치하면 식초가 된다.
전통 방식으로는 포도 원액을 끓인 후 나무통에 넣어 최소 12년, 길게는 25년 이상 숙성시킨다. 오렌 세월을 거치며 조금씩 양이 줄어들다 보니 여러 개의 나무통에 조금씩 옮겨 담는데, 각기 다른 수종의 나무통들이 발사믹 식초에 독특하고 다채로운 향을 입히게 된다.
모데나에서 맛볼 수 있는 시그니처 요리로는 살라미의 일종인 참포네, 생햄인 코테키노 모데나가 있다. 만두 모양으로 안에 고기와 치즈를 채운 토르텔리니도 모데나식 파스타이다. 돼지족발과 비슷한 카펠로 델 프레테, 돼지비계로 만든 스프레드인 페스토 모데네세, 돼지껍데기를 바삭하게 튀긴 치촐리 등이 있다.
이 중 파스타는 단연 파바로티의 ‘최애’였다. 그는 미트소스가 든 볼로네즈와 스프에 만두 형태의 파스타를 넣어먹는 토르텔리니 브로도, 크림소스인 토르텔리니 알라 판나, 미트소스와 넓적한 면을 층층이 쌓고 크림소스로 마무리한 라자냐 등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일명 ‘느끼한 파스타’로 통하는 까르보나라와 알프레도 역시 북부 이탈리아에서 주로 먹는다.
파바로티는 집에서 느긋하게 요리하는 것도 좋아했다고 한다. 쉬는 날이면 파르마지오 치즈와 프로슈토 햄, 수타로 직접 뽑은 파스타와 정원에서 가꾼 야채로 파스타 한 상을 차려냈다. 그는 또한 레몬즙을 탄 에비앙 생수, 에밀리아 로마냐의 레드와인 람브루스코, 스위트 와인 빈산토 등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는 식성 때문에 파바로티는 한때 체중이 160kg까지 불어나기도 했다. 이때 그는 프로슈토햄과 송아지고기, 각종 야채 등으로 구성된 이른바 '저탄고지' 식단으로 다이어트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연 전에는 반드시 달콤한 음식을 먹었고, “설탕 없이는 무대 위에서 로맨틱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실제로 음악가들 중에는 공연 중 에너지가 바닥나는 일을 막기 위해 사탕이나 초콜릿을 먹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파바로티의 친구들도 음식 선물을 하면 그가 가장 행복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영국의 뮤지션 스팅은 파바로티를 위한 선물로 프랑스산 블루치즈인 로크포르 치즈와 몇 파운드의 스파게티, 파르미지아노 치즈에 프라이팬, 나무 주방스푼을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오리지널 레시피인 ‘파스타 파바로티’도 있는데 토마토 베이스에 레드와인, 마늘과 바질, 파르미지아노 치즈 등으로 맛을 낸 것이다.
론 하워드 감독이 2019년 그의 일생을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파바로티'를 보면 세계적 성악가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파바로티는 어디에 머물던 요리하는 것을 즐겼으며 자신의 집을 방문한 이들에게 항상 "뭘 좀 먹을래요?"라고 질문한다. 맛있는 음식으로 지인들과 소통하고 기쁨을 주는 것이 음악 외에 파바로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가치였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