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고 있던 음식들
사극도 막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故 김재형 감독의 작품 중 광해군과 김개시를 주인공으로 한 '왕의 여자'가 있다. 극 초반쯤에 김개시가 광해군을 위해 궐 안뜰에서 직접 딴 송화가루를 선물하고, 광해군이 꿀물에 탄 송화가루를 보며 김개시를 떠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드라마와는 달리 실제로 송화가루는 소나무에서 그냥 딴다고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드라마 속에 나온 송화가루 탄 꿀물은 그냥 샛노란 빛깔의 차였다(국화차였던 듯..). 연세가 꽤 됐던 김재형 감독이 이런 오류를 그냥 넘긴 걸 보니 송화가루가 사실상 잊혀진 음식이 된 지가 생각보다 오래됐구나..를 실감하게 된다.
1992년도, 내가 강릉에 내려왔을 때의 이야기다. 무료한 생활에 지쳤단 엄마는 친척 할머니에게서 송화가루 따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아직 피지 않은 소나무 수꽃을 따 모아 군불을 땐(사실은 보일러) 방에 두어 꽃이 벌어지게 한다. 그러면 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는데 체로 일일이 쳐서 꽃 부분을 완전히 제거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산에서 따온 소나무 꽃에는 먼지며 온갖 이물질이 딸려오다 보니 그대로 식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수비(水飛:직역하면 물에 날리다)'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게 엄청난 중노동이다. 깨끗한 물에 송화가루를 풀어 넣고 박박 비벼서 씻는다.
씻는 동안 이물질을 그때그때 제거한 후에는 다시 불을 땐 방에 덩어리진 송화가루를 말린다. 수분이 거의 없어지면 다시 체에 내리고 다시 물에 비벼 씻는다. 이 과정을 무려 너댓번은 계속하고 나서야 비로소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첫 성과물(!)로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잠자고 있던 다식판을 이용해 꿀을 섞어 반죽한 송화가루를 다식으로 만들었다. 아버지 말씀으론, 어렸을때 맛본 송화다식은 식감이 좀 더 뻣뻣했다고. 아마 귀한 꿀을 아끼다보니 그랬던가보다...
송화가루는 보통 이렇게 다식으로 만들어 먹거나, 아니면 송화밀수라고 해서 차가운 꿀물에 타서 마신다. 궁중 별미였다는 송화밀수는 가루가 물에 풀리지 않고 그대로 떠 있다보니 마치 샛노란 물감이 덮여 있는 듯한 모양이다. 화분을 직접 섭취하는 식문화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어, 일본 등에서도 이 송화가루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송화가루는 가공하는 과정이 엄청 번거롭고 까다로운데다, 설상가상 요즘은 대기오염이 심해 먹었다가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엄마 건강이 더 나빠지시기 전에 나라도 송화가루 만드는 법을 배워놓아야 하는거 아닌가 드는 요즘이다....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은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