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근거지'라는 말이 생긴 시대(2)

성실함의 가치를 지키려는 자세

by 최선

우리 학급은 28명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중 13명이 등교를 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몸이 좋지 않아 결석을 하거나 현장체험학습을 신청한 것이다. 교실은 필요 이상으로 넓어 보였다. 책상 사이의 여백에 괜히 마음이 헛헛했다. 등교한 아이들마저 아침 조례가 어색한 눈치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끌벅적해야 할 아침 교실이 너무 조용해서, 인사조차 공중에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괜히 출석부를 빨리 덮고, 이 적막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졌다.


처음으로 아이들과의 아침 조례가 불편한 순간이었다. 학교에 등교한 아이들은 등교하지 않은 아이들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아이들의 결석을 내가 대신 변명해 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변명할 말도 없었다. 열이 38도가 넘는데도 불구하고 등교를 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그저 조금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 뿐인데 혹은 조금 늦잠을 자버려서 등교를 하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개근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학교에 나오는 자세에 대해서 아이들이 고민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학교의 의미가 이전과 많이 바뀌었지만, 그중 가장 많이 바뀐 것은 간절함이 아닐까 한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경우만 해도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고, 대학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다.


한 학급에 50명이 넘는 인원이 좁고 낡은 나무 책상에 빼곡히 들어앉아 선생님의 수업을 경청하던 시기, 숨 막히는 교실에서조차 배움은 놓칠 수 없는 것이었고, 학교는 선택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교실은 다르다. 20명 남짓한 학급조차 채워지지 않은 채 하루를 시작한다. 빈 책상은 이제 특별한 풍경이 아니다. 나는 그 자리를 보며 묻는다. 아이들이 덜 간절해진 걸까, 아니면 세상이 더 많은 선택지를 허락하게 된 걸까.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는 ‘개근거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쓰인다. 체험학습으로 해외에 다녀오고, 학기 중 여행 사진이 단체 채팅방을 오가는 시대에 매일 학교에 오는 아이는 때로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놀림의 대상이 된다. 빠지지 않고 등교한다는 사실이 성실함이 아니라, ‘빠질 수 없는 사정’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 말속에는 학교보다 바깥의 삶이 더 풍요롭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실제로 매일 등교하는 아이들 중 일부는 여행을 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갈 수 없어서 학교에 오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체험학습 신청서가 선택의 문제로 보이지만, 어떤 가정에서는 애초에 선택지에 올라 있지 않다. 학기 중 며칠을 쉬는 일이 쉼이 아니라 지출이 되는 집도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학교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한 하루의 장소다. 나는 그 아이들이 출석부에 남기는 작은 체크 표시가 성실함인지, 포기인지, 혹은 현실과의 타협인지 쉽게 단정할 수 없게 되었다.


체험학습을 갈 수 없는 아이들의 가정형편이나 삶의 무게, 그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가정의 형편과 환경은 교실 안에서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매일 학교에 나온다는 이유로 조롱받아야 할 아이는 없다. ‘개근거지’라는 말이 가볍게 소비될수록, 그 말에 담긴 무심함은 누군가의 하루를 조용히 짓밟고 지나간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른의 역할이다. 특히 부모의 말과 태도는 아이들의 기준이 된다. 체험학습을 다녀온 경험을 자랑하는 일과, 학교에 남아 있었던 아이를 낮춰 보는 말은 전혀 다른 문제다. 아이들은 어른의 시선을 그대로 배운다. 빠지는 것이 능력이 되고, 남아 있는 것이 뒤처짐이 되는 순간, 교실 안의 가치 기준은 너무 쉽게 뒤집힌다. 나는 그 변화가 아이들 스스로의 선택이라기보다, 우리가 만들어준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병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몸이 아파 학교에 오지 못하는 일 자체를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요즘은 병결이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당당하게 요청되는 순간들을 자주 마주한다. “병원 다녀왔어요. 진료확인서 있으니까 병결 처리해 주세요.” 이 정도면 양반이다. "오늘 병결 쓸게요."라는 말만 카톡으로 남기는 경우도 태반이다. 아이들은 그 말을 마치 출결 버튼을 누르듯 말한다. 아픔에 대한 설명도 결석에 대한 연유도 없이 절차만 남는다.


그 태도 앞에서 나는 종종 멈칫한다. 병결은 분명 인정되지만, 그 말 한마디에 담긴 태도까지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결석을 처리해 달라는 요구처럼 들릴 때가 있다. 출결은 더 이상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행정의 문제가 된 듯했다. 교사는 사정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서류를 확인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학교에 나오는 일이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닌 시대가 되었지만, 제도가 허용한다고 해서 모든 결석이 가벼워져서는 안 되고, 병결이라는 말 한마디가 관계를 생략하는 면죄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학교에 온다는 일은 여전히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선택이며, 그 선택에는 최소한의 책임감이 따라야 한다.


나는 아이들이 매일 학교에 나오기를 강요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학교에 나오지 않는 선택이 쉬워진 만큼, 나오는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였으면 한다. 여행을 갈 수 없어서, 아파도 쉬지 못해서, 혹은 그저 학교가 하루의 중심이어서 남아 있는 아이들이 더 이상 뒤처진 존재처럼 불리지 않기를 바란다. 성실함이 시대에 뒤처진 가치가 아니라, 여전히 지켜야 할 태도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학교에 꾸준히 출석하며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함. 출결을 대하는 태도에서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보이며, 개인의 편의보다 일상의 지속성을 선택함. 변화하는 교육 환경 속에서도 성실함의 가치를 지키려는 자세가 돋보임.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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