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결을 말하는 순간, 교사는 악역이 된다.
교사의 하루 일과 중 그 시작을 여는 첫 번째 업무는 바로 조례 시간, 학생들을 마주하며 출결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의 교실은 예전처럼 아이들로 빽빽하지 않다. 수능이 끝난 고3 교실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출결을 대하는 분위기는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출결 상담을 하다 보면 가끔 낯선 순간을 마주한다. 예전 같았으면 조심스럽게, 혹은 예민하게 받아들여졌을 이야기들이 요즘은 의외로 가볍게 흘러간다. 학부모와의 유선상담에서 학생의 결석이 잦다는 말에 “유급은 아니죠?”라는 답이 돌아오고, 지각이 반복된다는 이야기에 “아이에게 불이익이 있나요?”라는 반응이 덧붙는다. 학부모들은 말한다. “결석해도 공부만 하면 되잖아요.” 나는 그 말에 반박할 힘도 자신도 없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던 날, 한 학생과 출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잦은 지각과 결석이 반복되던 아이였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요즘 출결 현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조금 더 신경 쓰도록 하자” 그 말은 훈계이기도 했으나, 진심으로 걱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대학은 여전히 성실함과 공동체 역량의 척도로 출결 현황을 본다. 또 대입을 차치하고서라도 성실함이라는 무형의 가치는 관성이 있기에 아이가 성장하고 난 후에도 그 관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것과 전혀 달랐다. “선생님, 어제 저희 엄마한테 전화해서 뭐라고 하셨다면서요.” 아이의 목소리는 이미 날이 서 있었다. “아파서 쉰 건데, 그게 그렇게 잘못이에요? 그리고 저 스카 가서 매일 공부도 했어요.” 순간 교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나는 출결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아이는 자신의 삶을부정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말을 덧붙일수록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아이의 말 뒤에는, 더 이상 학교에 매일 나오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결국 내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나는 아이에게 화를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날의 나는 교사가 아니라,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어른에 가까웠다.
교실의 분위기는 차갑게 굳었고, 놀란 주변 선생님들께서는 교권보호위원회에 안건을 상정하는 것을 고려해 보라고까지 말씀하셨다. 하지만 담임이었던 나의 마음은 조금 더 복잡했다. 교권과 학생 인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담임으로서 나는 학생이 학교에 오지 않으면 학부모와 상담을 해야 했는데, 아이는 그 일을 날카롭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갈등의 시작부터 바로잡아야 했다.
나와 갈등을 빚은 아이는 다문화 가정에서 자라왔고, 아이의 어머니는 베트남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고, 이런 상황에서 아이는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세상을 배웠을 아이는 인생에 효율적인 일과 비효율적인 일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에 남아있는 일은 그 아이에게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아프다는 이유로 학교를 가지 않고 최소한의 절차로 결석을 정리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스터디 카페에 가서 수능 최저 등급을 받기 위한, 혹은 내신 등급을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 효율과 비효율의 구분 지점에서 학교의 일과는 비효율로 분류되었을 뿐 아이는 누구보다 인생을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이미 삶의 방향성이 굳어질 대로 굳어진 열아홉의 아이에게 내가 출결이 중요하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날 이후 나는 출결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일이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출결을 말한다는 건 단순히 규칙을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아이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건드리는 일이라는 걸 그때 알았기 때문이다. 출결을 챙기자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묻는 말이 아니라, ‘왜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그제야 깨닫는다. 출결을 대하는 기준이 우리가 알던 것과는 꽤 달라졌다는 것을. 학교에 매일 오는 일은 한때 성실함의 상징이었다. 개근상은 노력의 증표였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참고 학교에 오는 아이는 ‘기특한 학생’으로 불렸다.
그러나 지금의 교실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체험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을 떠나고,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쉬어가는 선택도 존중받는다. 물론 체험학습은 결석 종류로는 인정결이라 생기부에 기재되지 않고, 몸이 좋지 않은 학생이 반드시 학교에 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의 인권이 중요한 가치로 부상되었고, 학교에서 배우는 수업이 아닌 삶의 현장을 체험하며 배우는 가치 또한 중요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흐름이 바뀌었고, 아이들의 삶 또한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교사로서 출결을 바라보는 마음은 복잡하다. 매일 묵묵히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면 나는 자꾸만 그 성실함을 이야기해주고 싶어진다. 그 선택이 틀려서가 아니라, 점점 드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출결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아이의 생활 태도이자, 가정의 선택이고, 지금 우리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그래서 나는 출결을 말할 때마다 조심스러워진다. 성실함을 이야기하면 강요처럼 들릴까 걱정되고, 쉼을 존중하면 책임을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오해받을까 망설이게 된다.
교사로서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면서도, 아이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나는 아직도 매일 학교에 오는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 선택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 선택이 점점 특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출결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된 걸까. 아니면,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는 기준이 달라진 걸까. 그 변화 앞에서 어른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