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벚꽃 대신 소년 보호 시설
"걔 나중에 무서운 일로 뉴스에 나오는 거 아니야?"
어떤 선생님은 아이의 행위에 공포를 느끼고 뼈가 섞인 농담을 뱉기도 했다. 호의를 베푼 친구의 식당 포스기를 털어 달아났다는 제자,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공포였다.
다음 날 학교에서 마주한 피해 학생, 그러니까 그 일진 무리의 아이는 평소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간데없이 푹 꺾인 어깨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 걔가 그럴 줄 몰랐어요. 불쌍해서 밥 한 끼 먹인 건데..." 아이의 목소리에는 허탈함이 묻어났다. 거친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지켜야 할 '경우'라는 게 있는데, 가출 중이었던 그 아이는 이미 그 선마저 드라이버로 뜯어내 버린 듯했다.
경찰서에서 학생의 행방에 대한 연락이 오고, 학부모님은 울음을 터트리시며 아이를 찾아달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출석부의 빈칸을 미인정 정결석이라는 행정 용어로 채우는 것뿐이었다.
문득 <경우 없는 세계>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소설 속 아이들이 파국으로 치달았던 건,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돌아갈 경우의 수를 영영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 반 아이도 그랬다. 부모에 대한 반항으로 도망친 거리에서 아이가 배운 것은 생존을 위한 배신이었다.
결국 사건은 내가 수습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섰다. 아이는 행정처분을 받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려져 있던 아이의 과거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엮여 나왔다. 우리 학교로 전학 오기 전부터 이미 오토바이 절도로 인한 소송이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아이의 죄는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판사의 눈에 비친 아이의 촉법 행위는 단순한 우발적 일탈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습관이자, 삶의 기질로 굳어진 위험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법은 아이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대신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선택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3월이 다 가기도 전에, 아이의 행선지는 학교가 아닌 소년 보호 시설로 결정되었다. 새 학기의 설렘으로 가득 차야 할 교실에서, 한 아이의 자리는 그렇게 영영 비어버렸다.
아이가 시설로 떠난 뒤에도 나의 핸드폰은 쉬지 않고 울렸다. 화면에 뜨는 이름은 아이의 어머니였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장문의 메시지와 통화. 주변에서는 이 정도면 교권 침해라고, 번호를 바꾸거나 차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아버지와의 이혼 후 홀로 남겨진 어머니의 정신 상태는 위태로웠다. 한 아이의 탈선은 결국 한 가정의 처참한 붕괴와 맞물려 있었다. 부모의 불행이 아이를 거리로 밀어낸 것인지, 아이의 방황이 부모를 무너뜨린 것인지 이제는 선후를 가릴 수조차 없었다. 나는 교사로서 그 위태로운 가정의 마지막 보루가 된 기분으로 그 비명을 견뎌냈다.
아이는 소년보호시설에서도 간간이 소식을 전해왔다. “선생님, 저 여기서 정말 성실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나가면 꼭 뵙고 싶어요.” 그 짧고 예의 바른 메시지들을 보며 나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레 떠올렸다. 그래도 아이의 본성은 선한 것이 아닐까, 환경이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유예된 절망일 뿐이었다. 얼마 후 들려온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시설에서 잠시 외출 허가를 받은 사이, 아이가 금은방을 털었다는 이야기였다. 성실하게 지내고 있다는 그 다정한 연락을 보낸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믿었던 아이의 목소리는 무엇이었고, 내가 지키려 했던 그 아이의 가능성은 실체가 있는 것이었나. 아이는 교사인 나조차 기만하며 자신의 비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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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문한다. 아이의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시기는 언제였을까. 가방에서 드라이버가 발견되었을 때였을까? 아니면 어머니의 장문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였을까? 아니다. 진정한 골든타임은 아이의 후드집업에서 눅눅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던 그 첫날이었을 것이다. 씻지 못한 머리카락 냄새가 아니라, 마음이 썩어가는 냄새를 교사인 내가 먼저 맡았어야 했다. 아이가 교실 구석에서 잠을 청하며 세상으로부터 로그아웃을 시도할 때, 나는 그게 단순한 피로가 아닌 절박한 구조 신호임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교사는 아이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는 구원자가 아니다. 그저 습관이 기질이 되고, 기질이 삶의 양식으로 굳어지기 전 그 위태로운 냄새를 가장 먼저 맡아야 하는 사람일 뿐이다. 한 아이를 넘어 한 가정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속수무책으로 들으며, 나는 교사라는 직업의 무력함과 책임을 동시에 배운다.
어쩌면 경우가 없었던 것은 미숙하고 어린 아이가 아니라, 무정하게 아이를 방관하던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비록 주변의 어려운 환경에 흔들리며 잠시 길을 잃었으나, 아이가 보낸 구조 신호들이 언젠가는 스스로를 치유하는 힘으로 변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길 기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