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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준 Jul 05. 2023

'왜 우린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에 관한 고찰

돈과 일 그리고 자기 성장에 저항이 생기는 이유

한국에서 학교를 나왔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들었을 법한 이야기가 있다.

"공부 못하면 삶이 힘들어질 수 있다. 공부해야 삶이 윤택해진다,"


표현의 방식이나 어구는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대부분 저러한 맥락의 이야기였다. 

`학생은 공부를 통해 우수한 성적을 도출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삶의 선택지가 넓어지고 기회가 다가올 확률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공부는 필수불가결 하다.`


대부분 맞는 말이고 이런 맥락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거부감을 일으키거나 반하는 의사를 표현했던 사람은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대게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선`이란 내가 두 번 다시는 이런 몰입과 집념, 인내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미친 수준의 몰입을 의미한다.



잔인한 학벌 간극 


그럼 우리는 알면서 왜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학술 연구 자료가 많이 인용되는 책을 읽다가 문득 갑자기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학벌이 주는 격차가 절대적이다라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그 격차를 잘 느끼지 못했다. 혹은 느껴지더라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오만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엄청난 기회의 차이를 만든다. 내가 10년 동안 만든 경력으로도 사력을 다해야 얻을까 말까 한 것을 소위 말하는 학벌이라는 스펙이 좋은 누군가는 1년 차 때 아무렇지 않게 얻을 기회일 때가 간혹 있다. 아니, 많은 것 같다.


분명히 사회 생활을 시작할 때는 크지 않았다. 필요성도 몰랐다. 굳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일`의 깊이와 전문성, 책임이 많이 요구되는 환경으로 접어들수록(*=시간이 흐를수록) 학벌은 엄청난 격차를 만들었다. 


애초에 내가 얻을 수조차 없는 기회도 많았다. 정말 간절하게 오랜 시간 만들어온 결과물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비교적 낮은 난도로 쉽게 얻어내는 그들의 모습은 내게 상대적 박탈감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고등학생 시절 방에 갖다뒀던 독서실 책상, 공부를 아예 안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지금의 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학벌은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현재 나는 고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다) 이는 간단한 이유다. 학벌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 지금 내가 하는 것들을 그대로 워킹하는 것보다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학생들에게는 반드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본인의 부가가치를 발현할 기회를 빠르게 찾은 학생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공부하라고 꼭 부탁하고 싶다.


'불편한 진실'과 '상대적 박탈감'을 경험하지 못해서

깨닫고 나선 늦는다.


다들 어른이 되면 후회한다고 한다. 어른들은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학벌이 주는 격차로 인해 생기는 박탈감과 불편한 진실들은 종종 내 삶을 불행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성장하기 위한 동력을 상실시킬 때가 많다는 것이다. 

계층 사다리를 오르든, 꿈을 이루든, 자산을 쌓든 어떠한 저항을 밀어내고 다른 삶을 살기 위한 행동들이 지속 되어야만 하는데 불편한 진실과 상대적 박탈감은 자꾸만 내가 무언가 시작하기도 전에 힘을 빠지게 한다.


나는  죽어라 무언가를 위하여 노력하는데, 누군가는 사회에 나오고 보니 그 무엇인가를 얻고 시작한다. 

더불어 이미 벌어진 격차도 모자라 그 누군가는 자산 증식에 복리 효과처럼 더 높은 속도로 격차가 벌어진다. 그가 미친 듯한 속도로 격차를 만들고 성취를 해나가는 모습을 나는 옆에서 보고만 있다. 


내가 하는 노력과 결과물이 갑자기 매우 작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내가 이렇게 해서 과연 얼마나 도달할 수 있을까?`,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걸까?`와 같은 생각은 내 삶의 동력과 의지를 무너트린다.


그리고 그제야 깨닫게 된다. 정확히는 후회하게 된다.


"어른들이 이야기 했던 게 이런 거였구나"



받아들이기


인서울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학생 시절에야 좋은 대학에 나온 선배들은 그저, 좋은 대학에 간 멋진 형, 누나 들이었을 거다. 저 사람들은 삶이 조금 윤택하겠구나. 딱 이정도였다. 그래서 학벌을 위한 공부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편한 현실에서 우리는 그제야 후회한다. 느껴보지 못한 불편함과 절망감을 어른들의 조언만으로 체감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내가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공부를 안 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 정도까지 삶의 격차가 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알았어도 와닿지가 않았을 거다. 나는 다르겠다고 생각했었다. 혹은 그 정도 미래까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거 자체가 스트레스였던 거 같기도 하다. 


우리는 대개 그렇게 실패했다. 이 실패는 내가 앞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시간 속에서 계속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며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열등감, 공허함, 불안함, 좌절, 두려움 등 부정적인 감정을 주기적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진실은 12년간 학업 생활의 성적일 뿐이니 기분 나빠해도 소용이 없다.



*상위 20%의 학생들만이 서울권역 대학을 입학할 수 있다고 합니다. `대게`라는 표현은 소수를 제외한다는 의미에서 이해를 도우려고 무례하게나마 빌려 쓰고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행동하기


사회에서의 어른들은 또다시 우리에게 조언한다.

"끊임없이 자기 계발하고, 일에 몰입해야 한다."


과거와 달리 성실한 건 의미가 없어졌다고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계속 자기 계발하며, 자신의 가치를 높여 계속 더 높은 보상을 얻을 수 있게끔, 생존할 수 있게끔 살라고 한다. 이 또한 표현이 조금은 다를 뿐 같은 맥락의 조언을 많이 한다.


우리에게는 학생 시절의 저지른 잘못과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남았다. 

학생 때 지겹게 들었던 어른들의 공부하라는 조언과 다를 게 없는 조언이다.


나는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매일 간절히 몰입하며 일하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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