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선함을 옹호하며
가끔 사고 실험처럼 상상해 본다.
만약 우리가 가진 모든 물질적, 정신적 조건들을 한순간에 리셋한다면, 과연 같은 상황에서 같은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나는 선행이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이기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칭찬이나 보상과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사회적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혹은 정서적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그래서 단순히 선행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누가 더 선하고 품성이 훌륭한지를 평가하는 기준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선행은 결국 ‘그 상황에서 내가 원했기에, 일종의 나의 이기심에 의해 한 것’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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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도덕 법칙을 지키려는 의무, 그러한 동기에서 나온 행위만이 도덕적이다.”
감정이 동기가 된 선행은 도덕적 순수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돕는 행위는 불완전한 동기에 의한 선행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난 가끔 칸트를 ‘정교한 카드집을 짓는 편집증 환자’라고 비꼬며 싫어할 때도 있었다. 지금도 칸트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자주 나도 모르게 칸트의 시각에서
스스로를 검열하는 나를 발견한다.
“윤리 교사로서 윤리와 철학을 가르친다는 페르소나를 강조하고 싶은 마음에 하는 선행은 아닐까?”
“수혜를 받는 상대방이 나의 선행의 대상으로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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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편으론, ‘그러면 좀 어때.’라는 생각이 든다.
극단적으로 따져 묻는다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집착으로 탐욕을 부리는 사람보다는, 베푸는 사람이 되려는 집착을 가진 사람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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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결국 임신과 출산의 경험에 대한 과잉 공감이라는 감정에 이끌려 기부를 결정했다.
여섯 명의 산모가 응급 분만 시 최소한의 위생적인 출산을 할 수 있는 출산 키트와, 갓 태어난 신생아들이 생존을 위한 필수 백신을 받을 수 있도록.
나와 아이, 두 명의 생명을 온전히 의료진에게 맡기고 올라간 수술대 위에서 나는 존재로서의 무력감을 느꼈다.
또 한편으로는 아이를 보기 위한 정신적 의지 하나로
스스로의 바이탈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기도 했다.
출산은 내게 모순된 경험이었다.
죽음의 두려움과 생명의 폭발이 한 몸에 공존하는, 한계 상황 속의 초연함 같은 것.
전쟁 상황에서 의료진은커녕 조력자조차 없을 수도 있는 환경에서의 분만은 극한의 두려움과 고립감이 느껴지는 한계 상황일 것이다.
내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작은 생명체를 품고 있기에 죽음조차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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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본다면 나의 기부는 불완전한 동기에서 비롯된 선행이 되겠지만, 나는 다소 불완전 할지라도, 뜨거운 감정으로서 인간임을 드러내는 것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