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술이 나의 불안에 말을 걸다

루이즈 부르주아 전시를 보고

by Selene H

루이즈 부르주아의 전시를 보며,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설명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었다.

‘역겨움’이라기보다는, 강렬한 에너지에 압도된 후 밀려오는 일종의 소진이랄까.


지난 겨울 삼청동에서 보았던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시를 본 후에도 비슷한 감각이 들었었고, 그때 전시관을 나서자마자 탄산수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켰었다.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메스꺼움이 찾아왔다.



두 번째로 밀려온 감정은 공감,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 뒤엉킨 연민과 불편함이었다.

부르주아의 작품은 마치 자신을 잠식하던 불안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토해내듯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나 또한 불씨만 있었다면, 한순간 폭발해 스스로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나는 그녀만큼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저 충분히 젖은 심지에 불씨가 닿지 않았을 뿐.


그래서였을까, 나는 조금은 비겁하게도 철저히 안전지대에서 그녀를 공감하면서도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나는 저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아.”


또한 그 안도감 속에는 그녀를 조금 깎아내려 보고싶은 뾰쪽한 판단도 섞여 있었다.


“광기가 있는 여자야.”


압도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작업에는 무의식의 불안, 가족, 여성의 몸과 성, 모성, 상처의 치유 같은 주제가 겹겹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 프로이트적 자기 분석의 흔적처럼 느껴졌고, 정돈되지 않은 감정들이 외줄 타기를 하듯 위태롭게 얽혀 있었다.



특히 〈임신한 여인〉에서 오래 머물렀다.

과장되게 팽창한 배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듯했지만, 동시에 전체적인 실루엣들은 불안하게 흩뿌려지고 뒤틀려 있었다.


사랑과 헌신의 상징인 모성이, 한편으로는 예술가이자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강력한 힘이었던 것이다.

세 아들을 출산한 그녀에게 모성은 기쁨과 사랑의 원천이면서도, 스스로를 가두는 전기 울타리 같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전시를 보다 문득 **U2의 〈With or Without You〉**가 떠올랐다. 전혀 다른 주제지만, 그 노래 속 보노의 양가감정이 부르주아의 세계와 결이 닮아 있다고 느껴졌다.


사랑과 자아의 소멸 사이의 갈등, 자유와 안정 사이의 갈등.. 아이를 낳으러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내 귀에 마지막으로 꽂혀 있던 음악이 이 곡이었다.



자크 랑시에르라는 철학자는 『해방된 관객』에서 이렇게 말한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반드시 관객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 그것 자체가 또 다른 권위의 행사다.”


이에 따르면,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반드시 내가 무언가를 이해하고 느껴야 할 강박을 느낄 이유도 없어진다.



함께 미술관에 들어갔다가 각자의 동선대로 전시를 보고,

푹 빠져 긴 시간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남편의 첫마디.


“저런 작품들에 가치를 매기는 기준은 뭐야? 누가 정하는 거야?”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자기들끼리 공감하는 거 같아.”


그래서 난 남편에게 말했다.


“다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어. 느껴지지 않으면 그냥 안 느끼면 되는 거야.”


그리고 랑시에르의 관점에 대해서도 설명해 줬다.


“그중 하나는 60억이 넘는다던데, 믿겨?”


남편의 자본주의적 푸념이 이상하게 귀엽고 고마웠다.

과몰입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를 현실로 끌어올려 주었으니까.

둘 다 허우적거릴 필요는 없으니까.


사진: 필자 촬영 | 루이즈 부르주아 〈임신한 여인〉, 《덧없고 영원한》 전시, 호암미술관 (용인)

작품 저작권 : Louise Bourgeois / The Easton Foun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