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7년 생이다.
순천향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태어났다.
엄마는 8개월 만에 나를 낳았고 인큐베이터에서 2개월을 더 지냈다고 한다.
팔삭둥이지만 태어난 생시를 기억 못 하셔서 나는 아직도 제대로 된 사주를 못 보고 있다.
의사는 나를 일주일 내로 죽을 거라고 했다. 조산아가 많지만 그 시절에는 출산 후 며칠 내로 죽는 생명이 참 많았을 것이다.
기적처럼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를 삶이 부여되었다. 경직성 뇌성마비의 삶.
나는 젖을 먹이면 바로바로 토했다고 한다. 아빠를 닮은 아랫입술이 무척 두꺼운데 나는 식탐이 강해서 그 무거운 주둥이를 계속 들이댔다고 한다. 온갖 장기가 약해서 무엇을 먹던지 앞으로 뒤로 계속 뱉어내서 밤낮 없이 삶고 빠느라 너무 고되셨다고 한다.
또한 의사는 '이 아이는 살아났지만 평생 휠체어를 탈 운명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존심이 남달랐던 엄마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자리에서 "나는 절대 내 아들을 그리 살게 두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박차고 나오셨다고 한다.
5살 때까지는 속절 없이 기어다니는 것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의 그 시절 사진은 모두 네 발 사진 뿐이다.
엄마는 내가 5살 때 결단을 내렸고 회사에 사표를 내셨다. 엄마는 숙대 영문과를 나온 재원으로 동아일보(여성동아) 기자셨다. 그 시절 논현동에 있는 '양우아파트'에 살았는데, 나만 안 태어났으면,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안정되고 부유한 삶을 사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나에게 영원한 엄마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부채 의식, 죄의식의 단초가 되었다.
'가장 높이 빛나야 할 시절을 나에게 오롯이 헌신하셨던 당신'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표를 낸 엄마는 이를 악물고 나의 직립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다하셨다. 지하철 계단이 깊은 곳을 찾아 다니셨고 밑에 나를 무작정 내려 두고 올라오기를 반복하셨다고 한다. 기어서 올라왔을 것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안고 올리며 "혹시 계모냐"라는 질문까지 던졌다고 한다.
엄마는 원래 어릴 때부터 책만 보는 문학 소녀였는데, 아빠를 만나고 나를 낳아 키우며 점점 두께 없는 여전사로 변해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