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부터 형이 기획한 여행. 오각형(엄마, 형, 나, 마늘, 딸)이 처음으로 다같이 가는 여행이었다.
엄마와 형, 나(삼각형)는 1996년 겨울 두 형제의 대학교 입학 기념으로 '켄싱턴 호텔 설악 리조트'에 갔다.
눈이 많이 왔었다. 어디 나갈 엄두를 못 내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에 피자를 먹었는데 치즈량이 엄청 났던 두꺼운 피자를 우리 형제는 두 판이나 먹었다. 내가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던 여행.
엄마는 그 이후에 두 아들이 속썩일 때마다, 위험한 생각이 들 때마다 혼자 이 호텔에 와서 생각 정리를 하고 마음을 새롭게 다지고 가셨다고 한다.
개차반으로 놀던 대학 시절. 가끔 엄마가 연락 없이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 밤은 얕은 걱정과 깊은 짜증이 교차했다. 나는 그 시절 숱하게 외박했으니(일주일 연속도 허다) 분명 그런 밤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냥 엄마는 이 호텔이 좋았단다. 1996년 두 아들의 '첫 마음의 그 시절'이 그리웠단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시간 내기 힘든 형이 몇 달 전부터 시간을 꼭 낸다고 '확언'했고 예약했다.
황금 연휴의 교통 체증을 예상하며 지레 겁먹은 나는 '새벽 6시 출발'을 공표했고, 새벽에 엄마 집 가는 시간마저 줄이고자 전날 우리 집에 와서 주무실 것을 제안했지만 엄마는 예상대로 거절했다.
'기침'으로 밤새 잠을 설친 하니가 새벽 5시 반에 못 일어났고 마늘과 나는 한 시간을 더 재우기로 했다.
간극에 나는 엄마집에 갔고 엄마를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어렵게 일어난 딸이 뭔가 투박했나보다.
서재방에 있던 내게 엄마의 익숙하고, 엄격한 카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하니! 너 안 되겠다. 일루 와봐라. 할 말이 있다."
"내가 왠만하면 넘어가려 했는데 보자보자 하니 안 되겠다. 어른이 왔으면 인사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너 할머니가 이렇게 한 마디 하는건 처음이지? 너 할머니가 50년 전부터, 한국일보 시절부터 별명이 '쌈닭'이었어? 몰랐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사는 기본이다. 알았니?"
"죄...송...합니다."
발걸음 소리가 더 들리고
"야야. 너도 가기 싫으면 가지말자."
"어머니 가야죠. 당일날 취소하면 환불도 안 되요."
"야. 내가 돈 다 내줄테니 그냥 가지 말자."
엄마는 삐쳤었다. 점점 빈도가 잦아지고 발화점은 낮아진다.
십여분 전 집에 들어올 때 마늘과 딸이 각자의 사정으로(마늘은 짐싸기, 딸은 감기) 당신에게 반응이 심드렁하자 "야. 애들이 여행 나랑 가기 싫은거냐?" 라고 나한테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다. 엄마는 '피해의식'이 점점 심해진다.
난 나서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몇 분이 지나 마늘이 말한다.
"어머니, 하니가 밤새 기침이 심했어요. 잠을 못 자서 그런거구, 어머니 새벽엔 사람이 좀 투박하잖아요. 하니도 저도 이 여행 엄청 기대하고 있어요. 새벽에 못 일어나서 더 재웠고 방금 깨우니 오히려 저한테 왜 새벽에 안 깨웠냐고 징징 거렸어요. 저랑 하니랑 다 어머니랑 이 여행을 가게 되서 즐거워요. 며칠 전부터 설렜다니까요? 어머니 그냥 우리랑 다같이 즐겁게 다녀오시면 되는 여행이에요."
엄마는 마음이 금세 풀렸다. 내가 안 나서길 잘했다. 나섰으면 파국이었을 수 있다.
이번 여행 중 '엄마가 총명했던 단 몇 분의 유일한 순간'이었다.
가는 내내 엄마는 재잘재잘이다.
"야야. 켄싱턴 호텔이라니, 참 좋은 호텔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와서 묵은 호텔이다."
"니 애비가 죽기 전 날 불러 17년 만에 만난 자리에서 나보고 고생했다고, 사랑했다고 말했다."
"야야, 하니가 니 애비를 닮아 노래를 잘 하는구나. 나중에 커서 너무 예뻐서 남자들이 디글거리면 어쩌냐?"
휴게소에 들려 내 카드로 기름을 넣으려는데 엄마가 카드를 주신다.
5만원을 넣으려던 나는 얍삽하게 '만땅'으로 바꾼다. 속셈을 알아챈 마늘이 눈을 흘긴다.
생각보다 덜 막혔고 우리는 속초 중앙시장에 도착했다. 인파가 엄청 나서 주차하는데만 40분 넘게 걸렸다.
매 번 가던 '동해 순대국'으로 들어가 순대국과 아바이 순대, 오징어 순대를 시켰다.
"야야, 내가 니네랑 여기 온지 20년이 되었구나"
"어머니, 5년 전에도 왔구요. 나 어머니랑 오빠랑 속초에만 열 번도 넘게 왔잖아요. 그리고 어머니랑 저랑 안지 이제 14년 되었어요."
"그러냐? 난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엄마는 '속초'를 좋아했다. 회 한 사발에 우리 부부랑 소주 한 잔 걸치는 것을 구비구비의 낙으로 삼으셨다.
서해안은 그냥 싫다고 하셨다. 산은 더 싫어하셨다. 강릉도 아니었다. 그냥 '속초'였다.
순대국을 먹고 나왔다. 마늘과 딸은 시장 구경을 가고 엄마랑 나는 카페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에스프레소'를 시키는 엄마.
"야. 속초가 이렇게 변했냐? 내가 20년 만에 왔지만 너무 많이 변했다."
엄마는 재작년 이모랑 속초에 놀러왔다 갔다.
그야말로 30년 만에 나는 켄싱턴 호텔에 왔다.
체크인을 하고 있는 내 옆으로 엄마가 왔다. 직원에게 묻는다.
"안녕하세요. 관리 명단에 제 이름이 있나 봐주세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호텔에서 메세지가 왔었어요"
있을리가 없다. 메세지가 온 건 아마 20년도 넘은 그 전 얘기일 것이고, 다시 옆으로 엄마가 왔다.
"그리고 내가 잠깐 둘러봤는데 리모델링을 했다고 하는데 20년 전이랑 변한게 없어. 그래서 좋아요."
이런 '대낮'을 가로지르는 질문을 극혐하는 '며느리와 손녀'는 저만치에 가 있다.
나는 그냥 마음을 비웠다. 새벽에 시동을 거는 순간부터.
이번 여행의 주인공은 그냥 '엄마'로 하자고 형과 마늘과 딸과 다 '공유'한 바였다. 착한 딸은 바로 끄덕였다.
우리 가족은 805호, 형과 엄마는 806호 였다.
곧이어 진천에서 형이 도착했다.
짐정리를 하고 마늘은 피곤하다며 낮잠을 잤고 나랑 하니는 엄마 방으로 갔다.
우두커니 책상에 앉아 계신 엄마가 형한테 몇 번이나 반복했을 그 말을 나한테 하신다.
"야야, 오웰아. 기억나니? 그 때 눈이 많이 왔고 창 밖을 우리 셋이 같이 바라보며 별도 세었다. 이 호텔이 나를 여러 번 지켜줬다. 그건 몰랐지?"
"하니야. 니 엄마 이름이 뭐였더라. 그 친구는 어디갔니?"
저녁에 '대포항'과 '동명항'을 고민하다가 동명항을 갔다. 동명항은 완전 변해 있었다. 동명 회타운. 동명항이야말로 대포항보다 고즈넉해서 내가 좋아하던 곳이었는데 10년 여만에 다시 찾으니 많이 변해 있었다. 우린 주로 대포항을 갔었다.
길가에 대충 주차를 하고 지척에 있는 아무 횟집에 들어갔다. '신가횟집'
한 상에 20만원짜리 세트를 시켰다.
거하게 스끼다시 상이 나오니 엄마 눈이 휘둥그레진다.
"야야, 나는 태어나서 이런 상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엄마는 우리가 말려도 기어이 서빙하는 분한테 만 원짜리 팁을 주신다.
"제가요 속초에 20년 만에 처음 와요. 잘 차려 줘서 고마워요. 마늘 좀 더 줄 수 있어요?"
예전의 엄마였으면, 불과 3년 전의 엄마였으면 무슨 난전을 안 가고 이런 껍데기만 휘황찬란한데를 들어왔냐며 난리가 났을 집이었다.
더 이상 엄마의 '20년 설'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고 말을 나눌 필요도 없었다.
엄마의 '막춤'은 더 이상 막을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생각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늙어버린 엄마, 찌그러진 엄마, 고약할 때가 그리운 노인네가 너무 불쌍했다.
2달 전 넷이 서천을 다녀 올 때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속도'가 '속력'을 넘어 버렸다.
두 여자가 잠들었고 누운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어김없이 깬 나는 화장실 스탠드불을 켜고 울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엄마한테 쏴붙인 말들이 기억났다.
"엄마가 참 나를 숨 막히게 키웠어, 나한테 조금만 더 숨구멍을 내어 줬다면 내가 좀 더 다르게 살았을 텐데. 형 공부 계속 한다할 때 집에서 쫓아 낸 거 심했잫아요? 안 그래요?"
"엄마, 아까부터 왜 무슨 말만 하면 20년이에요? 저랑 애들이랑 같이 몇 번을 왔는데요. 엄마 회나 좀 많이 드세요. 말씀 좀 그만 하시고!"
엄마는 내가 횟집 계산을 하고 나오니 가게 문 앞에 앉아 있는 두 마리 고양이를 보고 싱글벙글 웃고 계셨다.
"야야. 얘네 봐라...쌍둥이 같다. 얘네 뭐 줄 거 없니?" 엄마는 고양이라면 질색을 하던 분이었다.
처음에는 작았던 내 울음 소리가 점점 커졌다. 한참을 울고 나니 '황혼'이었다.
다음 날 805호에서 제일 일찍 일어난 내가 엄마 방문을 두드렸다.
"엄마랑 형 잘 잤어?"
"엄마가 아시안컵 축구 결승 본다 하셔서 함께 보고 잤어. 엄마 잘 주무셨대"
우리는 조식을 먹으러 갔다. 곤드레 나물을 산처럼 쌓아 온 엄마는
"야! 밖에 경치봐라. 오웰아 기억나니? 30년 전에 너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잖니? 내가 너를 혼자 다시 올릴 수 없어 고민하다가 형을 깨웠다."
"오웰아. 너 딸 이름이 뭐였지? 어쩜 저렇게 눈이 이쁘니?"
"야. 여기 음식이 너무 좋다. 며느리야. 나 커피 좀 타다줘. 아주 진하게. 미안하다. 내가 관절이..."
형은 일정이 있다며 식사를 마치고 '진천'으로 떠났다.
방으로 돌아와서 씻고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야. 니네 어디냐? 나 1층에서 아무리 니네를 찾아봐도 니네가 없다."
"엄마 진작 전화를 하시지. 저희는 방에 있어요. 올라올 수 있으세요?"
몇 분 뒤 엄마가 들어왔다.
"야. 니네가 나를 1층에서 기다리는 줄 알고 피해 안 주려고 급히 내려가서 20분 넘게 찾았다."
"엄마 그럼 체크 아웃은요?"
"응 니 형이 다시 와서 해주고 갔어. 차 시간 때문에 급히 갔어"
차가 막힐 까봐 바로 올라오려던 우리는 일정을 바꿨다. 마늘이 여기까지 왔는데 설악산이 코앞인데 케이블카 한번은 타고 가자고 한 것이다.
"야야, 20년 만에 니네랑 여행 오니 좋다. 아침도 맛있었고 좋다."
차에 타자마자 엄마가 또 말씀하신다.
"하니야, 큰 엄마랑 여행 오니 좋니?" 모두 어안이 벙벙했는데 눈치 빠른 마늘이 말한다.
"어머니~ 큰 엄마라뇨. 그럼 어머니랑 아주버니가 부부게요?"
하니도 그제서야 빵 터진다. 나는 빵 터졌다가...
엄마는 케이블카를 안 탄다고 했다. 무섭다고 하셨다.
신나게 우리 셋만 타고 오니 신신당부한 그 자리에 오두맣게 그대로 앉아 계신다.
"엄마! 좀 걸어다니셨어?"
"아니 이 자리에 그냥 있었어. 외국 사람들이 참 많이 왔어"
엄마는 활자 중독인데...55년간 가방에 영어 책과 '코리아 타임스'을 넣어 다니시며 어디에라도 잠깐 앉으면 읽는 분이었다. 장인 장모와 상견레 날도 '영어 신문'을 펼쳐 읽고 계셔서 민망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 책이나 신문 가져온거 없어요?"
"어 없어. 나 이제 눈이 좀 아파서 잘 안 보게 돼. 좀 됐어."
쿵. 그냥 쿵쿵쿵. 내 시끄러움을 마늘이 알리가 없다.
이현희 하면 '활자'인데, 15년 전부터는 은평구에서 유일하게 종이 '코리아 타임스' 일간지를 배달 받아 보시는 당신인데.
서울로 향한다.
"엄마 여행 좋았어요?"
"어 너무 좋았다. 석이랑 너한테 참 고맙네. 내가 해준 것도 없는데. 석이가 방값으로 얼마 썼다 했지?"
"80만원이요. 아침부터 이 얘기만 세번 째시네요."
엄마는 동그맣게 잠이 든다.
'인제' 즈음부터 막힌다. 엄마가 말한다.
"오웰아. 나 너무 메스껍다. 나 멀미해."
엄마는 어제도 멀미가 심해서 한 시간 넘게 창문을 열고 왔다. 어제는 하니랑 엄마가 뒷자리에 앉았었는데 하니 기침이 심한데도 나는 그냥 열고 쭈욱 왔다.
엄마의 호소가 점점 심해진다. 천천히 한 시간쯤 더 가다가 결단을 내렸다. 양평 근처였다.
"엄마 차라리 가까운 지하철 역에 내려드릴까요?"
"응. 그래줄 수 있니?"
도저히 더 못 가겠다며 국도에서 멈춰 차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고 오신 뒤였다.
제일 가까운 경의선 '양수역'에 엄마를 내려드렸다.
"아빠 이게 맞어? 할머니를 이렇게 보내는게 맞어?"
"어머니를 어떻게든 태우고 가야 했던거 아니야?"
속에서 부아가 올라왔다.
'그러면 아까 양수역 주차장에서 내가 엄마 차 타는거 보고 오자할 때의 그 더딘 반응들은 뭔데?'
계속 전화를 걸었다. 문자도 보냈다.
한참 지난 후에야 답이 왔다.
'지하철 무료 승차권이 사라져 무슨 역에선지 한참 헤매다 옥수역에 가서 연신내까지 가는거 역무원과 상의해볼참. 구리역이다.'
'지금 차 탔다. 옥수역에서. 오늘 내 생애 최악의 날이었다. 고맙다.'
'지하철 승차권도 방금 찾아냈어. 만사 오케이. 너희들 잠시라도 걱정하게 했다. 만사 오케이.'
나의 엄마는 스마트 폰이 싫다며 절대로 스마트 폰을 안 한다. 보이스피싱 걱정은 없다.
피처폰으로만 30년 째인데, 얼마 전 바꿔드린 폰이 너무 어렵단다.
활자에 있어 시리도록 엄격한 분이 저렇게 오타도 많고, 띄어쓰기도 안 하신다.
분명 여행은 참 좋았는데.
나는 이 일기를 보며... 앞으로 많이 울 것 같다.
밤 늦게 형이랑 통화를 했다.
"형 엄마 심각하다. 그런데 병원을 안 가시니 어쩌지?"
"오웰아. 전형적인 '치매' 증상이다. 너가 고생이 많다. 생각해 보자. 쉬어라."
나는 엄마랑 여행을 갔는데, 엄마가 없어진 여행.
엄마가. 자꾸. 없어진다.
엄마가 '양수역'에 내린 것처럼, 엄마가 갑자기 또 내리면 어떻게 하지? 나는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