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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총체

내가 인간인가?

by 하니오웰


어제 우리 세 가족은 원래 속초 체스터톤스 호텔로 1박 여행을 갈 계획이었다.

엄마까지 네 명을 기획했으나 그저께 엄마는 누가 집을 보러 온다 했다며 갑작스런 불참을 선언했다. '설 연휴 한 가운데 누가?' 라는 의아함이 일렁였다.(오늘 확인해 보니 사실이 아니었음)

나의 착한 친형은 여행 동행 제안 시점에 본인의 불참을 미안해 하며 숙박비를 결제해 주었고 우리 부부는 뜻밖의 횡재에 즐거움을 나누었다.


어제 새벽. 계엄 이후 자리잡힌 악습인 정치 유튜브 시청을 위해 티비를 켰다가 '강원도 30cm 대설 예보' 뉴스를 보고 빠른 결단을 내렸다.

아침에 여행 포기 의지를 알리니 마늘은 동의했고 이제 문제는 형에게 이 사실을 알리냐 마냐가 되었다. '100% 수수료' 때문이었다.

장고 끝에 전화를 했고 "암~ 니네 가족의 안전이 최우선이지! 뭔가 미안하네. 제수씨랑 연휴 잘 보내렴~" 이라는 군더더기 없는 AI 답변이 돌아왔다. 마늘과 나는 또 한 번 형의 '착함의 총체'에 감탄했다.

더 빠르지 못 했던 결정에 대한 짜증은 전화를 끊은 뒤 반드시 밀려왔을까?

못내 못 먹은 오징어 순대를 아쉬워 하는 마늘을 위해 프림이 섞인 듯한 순대국, 오징어 순대를 배달시켜 맛나게 먹었다

요즘 배드민턴에 빠진 딸은 오후 내내 우리를 졸라댔고 설연휴 기간이라 성미산 체육관은 4시 40분에 닫는다는 비보를 접하고 구청 6층 대강당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고 참 좋았는데.

"이게 맞아? 직원의 가족이 와서 쳐도 돼? 실례 아니야? 미안한데..." 심지어 저 말을 반복까지 한다.

속이 터진다. 뭐가. 누구한테. 왜. 미안한가?

어김 없이 형태 없는 남에게도 튀어나오는 끝간데 없는 '배려와 주저의 총체'. 착해서 나오는 소심함인건 알겠는데 내 이해의 범주에 좀처럼 들어올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잘 타일러 잘 치고 돌아왔다.

개업을 하고도 영업 하는 것을 이래저래 저어하고 있는, 그래서 해가 바뀌어도 휑한 사무실은 아니겠지?


엄마와 함께 빕스 식사 후 갈현동 엄마 집 대문을 열었다. '우리 집이 이런 온기를 품을 수 있구나?'

영하 20도가 되어도 보일러를 켜지 않으시는 시베리아 허스맘의 집이 맞긴 했다.

누누히 계고한 보람이 있었다.

엄마는 덥다고 아우성이셨지만 손녀를 앞세운 '보일러 투쟁'을 통해 1박을 거래하는데 성공한 우리 부부는 또 즐거움을 만끽했다.

침대에 나랑 누운 딸래미가 마루에서 할머니의 기침 소리가 계속되니 스르르 나간다.

할미를 껴안고 "할머니 아프지 마. 사랑해 잘 자~" 하고 들어온다.

외할머니에 비해 자주 안 봐 격조하다 여겼는데 이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학교에서 알게 된 장애가 있는 5학년 언니를 잘 보살핀다는, 아빠의 중국 파견이 끝나고 가족과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말이 서툰 같은 반 남자 애를 유달리 잘 챙긴다는 이쁜 내 딸. '따뜻함의 총체'를 폭 안아 잠들이고 침대가 비좁아 밑으로 내려왔다.


15년 전 새벽 두 시경. 개만취 후 담배를 꼬나 물은 채 집 앞에 쳐 자빠져 있던 나를 발견한 윗집 아저씨가 20여분 고민 끝에 데리고 함께 내려온 엄마에게 "왜 깨워 씨발 것들아!"를 쳐날렸던 비루한 나로서는 어제 하루 저 '착하게 배려하고 따뜻한 인간의 총체'를 제대로 혜량할 길이 아무래도 요원하다.

국자로 아들표 떡만두국 드시는 울 엄니.


https://blog.naver.com/hanipapa_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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