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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 400일(흡연. - 그 첫 만남의 시절. - )

Come to where the favor is!

by 하니오웰



가끔은 숫자가 주는 힘을 기념할 필요가 있다.

나에겐 금연보다 금주가 훨씬 더 어려운 목표이고 지향이지만.

담배를 안 잡은지 어언 사백일이다.

1996년 5월.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학번에는 유난히 재수, 삼수생이 많았다.

80명 정원에 재수생은 20명이 훌쩍 넘었고, 삼수생이 10명 정도는 되었다.

술 한 잔 들어가면 말을 놓으라는 호기를 일삼던 그들에게 팔로 목을 휘감으며 반가움을 표하기는 영 어색하던 1학년 초반 시절이었다.


봄빛 찬연했던 5월의 그 날. 나는 배봉관 화장실에서 옆에서 같이 오줌 싸던 같은 과 삼수생의 엉덩이를 툭 쳤다. '경색'과 이름이 비슷했던 그 형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졌고 오줌을 제대로 다 털고 나오지 못 했다.

"개새끼야, 싸가지 좀 말아 먹고 다녀라!"라는 말을 던지고 빠르게 걸어갔고 나는 따라가지 못 했다.

어슬렁 거리던 내게 20여 분 뒤 형은 다시 나타났고 1년 뒤 다른 계기로 소원해 지기 전까지 나는 '형'자를 꼬박 꼬박 붙였다.

빈 손이 아니었다. '디스' 담배 한 가치를 건네주며 "이거 피면 봐 줄께. 대신 이제 같이 남자 되는거다." 유치했지만 나는 불을 붙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더 친해졌고 해태 팬이었던 우리는 그 해 가을. 그 형 자취집에서 이종범의 원맨쇼를 업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 꼬나물고 즐거워 했다.


1학년 때 나는 크게 세 그룹의 친구가 있었는데 기타, 우수, 담배가 시그니처였던 동기 중 탑꼴초인 친구 놈과 실험동 앞 큰 나무 밑에서 '누가 필터 끊고 연속으로 이어서 많이 필 수 있는지.' 게임을 했다.

공평하게 말보로 레드(그 당시 타르 6mg로 기억) 몇 갑을 사왔었고 나는 11가치, 친구는 12가치를 폈다. 눈물이 나고 오바이트가 심하게 쏠렸다. 기억력이 나쁜 내가 가치 수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걸 보면 많이 괴롭긴 했는가 보다.


97년 나는 처음 후배를 받았고 나의 호기는 계속 되었다.

그 날도 찬연한 봄 날 중 하나였다. 나는 친구, 후배들과 노천극장에서 군만두에 맥주를 마시며 선물로 받았던 '지포 라이터 불의 강한 생명력'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 딸은 나를 '자주색 아빠'라고 자주 말한다. 돌아이를 의미하는 색이라고 한다.


나는 지포 라이터를 뒤집어 하늘로 던졌다. 불은 기세 좋은 화마가 되어 환란을 일으켰다. 옆에서 살을 부비던, 중간고사를 마치고 오수를 청하던, 일면식 없는 많은 귀여운 놈년들이 연못으로 숱하게 달려가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들고 뛰며 불길을 겨우 잡았다.

노천 극장의 절반을 태웠고 배봉산에 불이 안 번진 것에 안도하며 그 날 저녁 비어 파크에 가서 몇 시간 전의 무용담을 나누며 담배를 또 꼬나물었다. 맥주잔 옆에 재떨이를 두고 마음대로 필 수 있던 낭만 가득 찬 시절이었다.

다음 날 학교 곳곳에 대자보가 붙었다. 몰지각한 환경공학과 학우를 처벌해 달라는 대자보였고 '제명'이란 단어도 있었다. 그 날도 피고 마시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나의 그 시절은 그렇게 알코올과 담배로 창연했고 뇌와 폐는 절여져 갔다.

시린 겨울 잠금 장치 없이 너덜거리는 문을 손으로 잡고 화장실에서 급똥을 싼 날에도, 친구가 애써 뽑은지 한 달 된 그랜저 뒷자리에 큰 구멍을 낸 날에도, 국세 공무원 교육원 시절 제일 친했던 여동생과 건물 뒷편에서 가슴 떨며 밀담을 더한 날에도, 담배를 끊으신 아부지 사무실에서 그냥 편하게 하라셔서 재털이가 있으면 달라하고 혼자 꼬나문 날에도, 신혼여행 때 발이 아픈 나를 배려치 않고 고흐 생가를 꼭 보게 오겠다는 마늘에게 혼자 가라 하고 삐져서 정처 없이 기다리다 지나가던 프랑스 할머니에게 말보로 한 가치를 빌려 함께 나눠 핀 날에도 나의 28년 친구는 함께였다.


2023년 12월 27일. 그와 헤어졌다.

구청에서 제일 좋아하는 형이 그보다 일주일 전 금연을 시작하길래 힘 크게 안 주고 동승했는데 어느새 이 날까지 왔다.

이 기세의 끝은 언제가 될까?


https://blog.naver.com/hanipapa_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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