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직성 뇌성마비(3급 지체장애인)로 군대 면제를 받았다.
대학 시절 5 년간, 어쩌다 매일 나의 술잔은 다양한 처량함과 애틋함으로 마를 날이 없었다.
1학년 때 '공해문제연구회'라는 과 학회와, '삶과 말 그리고 강다리'라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간판만 달랐지, 순박하게 들뜬 선술 모임이었고, 나는 곧바로 기치를 올렸다.
솔직한 입담과, 경계 없이 부박한 나의 행동들은 술자리의 한가운데로 나를 끌여들였다.
아지와 모토는 의미가 없었다, 나는 사람이 미친듯이 궁금했고, 지겹도록 엄격한 으르렁 마마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즉흥적이고 말초한 성격 덕에, 매일 어김 없이 필름이 끊겼다.
남들은 1교시 수업에 늦을까 경사진 후문을 향해 뛰었고, 나는 동아리 방에서 뻗어 자다가 친구 자취집으로 처소를 옮기느라 후문에서 내려갔다.
그 결과, 1학년 2학기 때부터 내리 3연속 학사 경고를 맞았다.
단연코 훈장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부끄러웠지만 당당했다. 부지런한 병신이었다.
객쩍은 성적표는 돼지뽈살 단골집 아줌마의 서비스양에 전혀 일조하지 못했다.
1년을 꿇으라는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엄마는 경악했고, 밤새 분루를 삼키셨다.
나는 근신하지 않았다. 강의실로 오지말라 하니 더 성실히 등교했다.
동아리 연합회장에 출마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며칠 숙고했다. 엄마가 극렬히 반대했다.
'정치'의 근처라면 치를 떠는 엄마였다.
진청개구리의 시절이었는데, 순순히 엄마의 말을 듣고 출마의 뜻을 접었다.
가고자 했던 제3의 길이 꺾여 깊이 의기소침했다.
엄마는 나의 반성 없이 촘촘한 매일의 출타, 주취자 1년을 또 체념하셨다.
적어도 집에는 꾸역꾸역 들어오게 해줬다.
3일에 한 번 꼴로 외박하는 기세를 이어갔다.
다행히 복학 전에 계절학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열심히 미적분학을 재수강하고, 공업 수학은 삼수강했다.
후배들은 나를 어색해하지 않았다.
면제자 아류였기에, 군필자 정규 복학생보다 훨씬 친근하게 대해줬다.
어제도, 그제도 함께 술자리에서 격의 없는 개소리를 나눈 덜 떨어진 형, 오빠였기 때문이다.
1998년 3월.
3학년에 복학했다.
의가사 제대한 눈이 예쁜 아이와, 넉살 유머가 일품인 놈과 삼인조가 되었다.
신복환영회 날.
거나한 우리는 각 잡힌 신입생 다섯 쯤을 데리고 경희대 정문 앞에 우뚝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