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이 아닌 결로.

by 하니오웰



얼마 전 어느 잡지와 인터뷰를 했다. 최근 몇 년간 나에 대한 기사는 거의 암 환자 장영희, 투병하는 장영희에 국한되어 있어서 그냥 인간 장영희, 문학 선생 장영희에 초점을 맞춰 줄 것을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나는 열심히 문학의 중요성, 신세대 대학생들의 경향 등등을 성의껏 말했다. 그런데 오늘 우송되어 온 잡지를 보니 기사 제목이 ‘신체장애로 천형(天刑)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 희망의 상징 장영희 교수’였다.


‘천형 같은 삶?’ 그 기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난 심히 불쾌했다. 어쩌다 남의 삶을 ‘천형’이라고 부르는가.


맞다. 나는 1급 신체 장애인이고, 암 투병을 한다. 그렇지만 이제껏 한 번도 내 삶이 천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사람들은 신체장애를 갖고 살아간다는 건 너무나 끔찍하고 비참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있듯이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그러면서 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솔직히 난 늘 내 옆을 지키는 목발을 유심히 보기나 남들이 ‘장애인 교수’ 운운할 때에야 ‘아참, 내가 장애인이었지’ 하고 새삼 깨닫는다.


장애인이 ‘장애인’이 되는 것은 신체적 불편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생산적 발전의 ‘장애’로 여겨 ‘장애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못 해서가 아니라 못 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그 기대에 부응해서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신체적 능력만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비장애인들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 보라' 장영희




맑고, 곧고, 따뜻한 내 친구가

요즘 장영희 교수님 책을 필사하고 있다.

그 친구 덕에, 다시 나의 '장영희'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내가 책 보는 것을 싫어했다.

이유는 단 하나, '책 볼 시간에 공부해라'였다.

좋은 대학 갈 공부, 취업할 공부만을 원했다.

그 믿음은 단단하고 집요했다.

그 덕에 책을 거의 못 보는 독행무상(讀行無常)의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학에 들어가고 한 참 뒤, 유급을 맞고도 술떡이 되어 지내는 내게 엄마는,

"야, 이 화상아. 시간 내서 장영희 교수님 책 한 번 읽어봐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장영희 교수님의 책을 들었다.

그 분의 평온함, 잔잔함, 겸손함에 매료되어 모든 책을 샅샅이 찾아 읽었다.

'전작주의자'의 꿈을 실현한 것은 그 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내 삶의 바닥에,

‘천형’이라는 단어를 깔고 살아왔다.

그것은 누가 내게 씌운 낙인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게 새겨 넣은 문신이었다.


그 말을 박아 넣고,

내 자신을 단죄하고, 조리돌림해 왔다.


날카롭게 돋아 있음을 숨기고,

적당한 침묵과 화제 돌림, 어설픈 농담으로

나를 명명하고 재단하려는 말들 앞에서,

회피 신공을 발휘했다.


남들보다 일찍 태어났기에,

남들보다 조금 더 더디게 서야 했던 생의 불균형.

그것을 내 업이자 운명이라 여기면서도,

바글거리며 스스로를 갉아먹어왔다.


그러나 그 모든 회피는 결국 내게로 돌아와,

작은 비겁의 바늘이 되어 나를 찔렀다.

아무도 나를 ‘천형의 산자’라 부르지 않았는데,

나는 그 말로 내 이름을 감싸 부르며,

나를 묶고, 끝내 망실시켰다.


장영희 선생의 글을 읽고 나는 멈칫한다.

‘천형 같은 삶’이라 부르는 그 언명과 시선은,

얼마나 선명한 폭력인가.


병이, 장애가 몸을 잠식해도,

선생님은 그것을 벌이 아닌 결로 삼았다.

‘천벌’이라 여기지 않았다.

상처가 아닌 온기로 삼았다.

체념이 아닌 수용이었다.


나는 이제야 알겠다.

천형은 하늘이 내린 형벌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태도의 언어라는 것을.


이제 나의 불편을 부드러운 몫으로 받아들이겠다.

이미 많은 것을 체화하고, 내화했지만,

그것을 한 번 더, 나선형의 상단으로 올려보겠다.


이 삯은 고통의 값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의 몫이기에.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그 몫을 끝까지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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