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권, “그년 고집도.”

by 하니오웰



윤씨는 낮은 목소리로 서희를 꾸짖었다. 서희는 방바닥에 엎어진 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무서워하던 할머니였는데도.


“끄치지 못할까?”


“엄, 엄마 데려와아! 엄마아아 ― .”


윤씨는 몸을 돌렸다. 삼월이도 잠이 깨어 옷매무새를 고치며 급히 뜰로 내려왔다. 윤씨는 연못 옆에 한 그루 서 있는 버들의 좀 굵은 가지를 골라서 꺾는다. 흰 저고리의 소매는 어둠 속에서 학이 날개를 편 것같이 보였다. 발가벗은 나무들은 여기저기 우뚝우뚝 서서 윤씨의 동작을 지켜보고 있었다. 봉순네와 삼월이 제가끔 앞으로 손을 맞잡고 서서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윤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씨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어 신돌 위에 하얀 당혜를 벗어놓고 방으로 올라간다.


“끄치지 못하겠느냐?”


서희는 더욱 악을 쓰며 엎어진 채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울부짖었다. 윤씨 손의 회초리가 버둥거리는 서희 다리를 내리친다.


“마님.”


뜰 아래서 봉순네가 울먹거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연한 종아리는 이내 붉은 줄이 그어졌다.


서희는 빨딱 몸을 일으켰다. 그는 웃목에 놓아둔 반짇고리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그것은 실꾸리였으나 실꾸리를 집어 팽개쳤다. 순간 윤씨의 얼음장 같은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이윽고 윤씨 입가에 경련 같은 미소가 번진다.


“그년 고집도.”


윤씨는 만족한 듯 뇌더니 방에서 나왔다. 마당 귀에 회초리를 버린 윤씨는 아무 말 없이 별당에서 나가버렸다. 방 안으로 쫓아 들어온 봉순네는 파아랗게 까무러친 서희를 안았고 삼월이는 냉수를 가져와서 아이 얼굴에 뿜는다.


“애기씨! 애기씨!”


봉순네는 서희를 흔들어대었다. 서희는 눈을 떴다. 울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집념의 덩어리 같은 아이는,


“엄마 데려와!”


쨍! 하게 울리는 소리를 한 번 질렀다.


박경리 토지 1권 85p.





경황과 겨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 풀이 덜 돋았다고 눈치 살펴 아우성치는 시절이지만,

고민과 각토 끝에 토지 대장정에 동참했다.

원문에 더 충실한 출판사는 마로니에 출판사라 하였다.

새 책을 들이고 싶었으나 절판이었다.

중고 중에서도 최상품을 찾아 골라 172,000원을 긁었다.

아이에게 독감이 왔고, 마누라는 허리를 부여잡은 채 뒷다리살 보쌈을 해주었다.

내 어미는 책을 기다리던 사흘 밤낮 동안,

제가끔의 어수선함을 모아 해맑은 무지를 담은 문자와 전화를 계속하셨다.

어림잡아도 서른 통이 넘었다.

이십여 년 전, 삼분의 일쯤 읽다가 체념보다 빠르게 포기했던 대작.

오십에 다다라 어떠한 응전심으로 다시 잡았다.

앞뒤 보다 깊은 박경리 선생님의 천의무봉한 문장이 허락한 나날들이 기쁘다.

1987년이면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다.

내 집안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아비는 '말'지 사태로 안기부에 쫓겨 다니던 즈음이었다.

엄마는 KBS의 '동물의 세계'를 빼고는 어떠한 시력의 마모도 막았다.

그 음울이 암약하던 때,

메트로놈처럼 지내야 했던 내게, 대하드라마는 언감생심이었다.

박경리가 무엇인지, 토지가 누구인지 모르던 그 시절에,

내가 스치던 이곳 저곳 사각형 안에서의 '최수지'의 모습은 고혹이었다.

세상에 어찌 저리 예쁜 사람도 있는가?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아도 선뜻 훔쳐본, 최수지의 미모는 가감 없는 숨멎이었다.

엄마는 형에게는 그러지 않으면서도, 유독 내가 책을 보는 일만은 기어코 막았다.

산만하고 잡념이 많은 내가 책을 보면 공상의 늪으로 빠질까 염려했다.

무엇보다 장애인 아들의 ‘사람 도리’를 국민학교 시절부터 과하게 걱정해 온 탓이었다.

학교 공부와 관련 없는 책은 모두 금지였다.

그 금지는 국민학교를 넘어 고등학교까지 이어졌다.

대학은 내게 자유를 던져주었으나, 나는 그 방종을 술독을 비우는 데만 썼다.

여러 무모함들을 권세로 착각했다.

어쩌다 들었던 '토지'를 서너 평만 헤아리다, 박토에 처박았다.

다시 든 '토지'

사십 년 전, 서희가 건네준 다 여문 충격이 추상으로 오래 남았다면,

지금 이 장면, 서희가 드리워준 덜 여문 전율은 구체로 솟아온다.

'서희'는,

수그리지도, 매달리지도 않는다.

곧게 단단하다.

어디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가 낱낱하다.

세상에 제풀에 빚진 적 없고, 자기 몫의 비바람을 꼿꼿이 맞을 태도가 서 있다.

이 빳빳함은 고집이 아닌 '품위'이며, 분노가 아니라 '자존'이다.

앞으로 펼쳐질 애쓰지 않고

비껴 서지 않을,

추상같을 기개에

나는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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