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유리

꿈과 시간의 연결성

by 미키


어느 날 나에게 낯선 이가 찾아왔다.


밤마다 매일같이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면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밤은 나와 함께 즐겨보지 않겠냐고. 너의 공허한 심장을 다 채워줄 수 있는 마법 같은 곳이 있으니 나와 함께 가자고 했다.


부드러운 미소와 흑갈색의 머릿결, 길고 긴 손가락 사이에서 나는 우리의 미래가 반짝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밤 12시. 그러나 그 시간만큼은 찬란하게 빛나고 마치 정오 12시를 가리키듯 뜨겁고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우리를 내리쬐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때로는 버스를 타고

밤바람이 불어오는 창문 사이로 머리를 넣어보고 까르르 웃으면서 그렇게 회색빛 텅 빈 눈동자들도 하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깐 잠이 든 사이 시간은 빛의 속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 종착역입니다. 내리세요."


기사님의 한 마디에 잠이 깬 나는 두 눈을 비비며 도착한 곳에서 두리번두리번거렸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어리 둥절거리며 버스의 뒷문을 통해 터덜터덜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내려왔다. 익숙하지 않은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은 방금 전 보았던 찬란한 풍경이 아니었다. 습하고 회색빛의 퀴퀴한 검은색으로 가득 채워진 도시 풍경. 간간이 보이는 창문으로 비치는 빛이라는 건 희미했다.


내가 왜 여기에 왔냐고 기사님에게 물어볼 용기도 없이, 무작정 길 위에서 그냥 길이 앞으로 뻗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걸었다. 걷다 보면, 뭔가가 나올 거야. 예전에도 그랬으니까. 퀘퀘묵은 회색빛은 점점 새카만 하늘로 변해갔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이상한 하늘이었다. 별조차도 없는 그 새카만 하늘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방향도 없었다. 내가 걸어가는 곳은 앞인지 뒤인지 알 수도 없는 곳이었다.


죽어라 뛰어가고 죽어라 걸어가는 것도 무의미한 곳.


그렇게 시커먼 하늘을 보며 얼마나 걸었을까.

그 시커먼 하늘에서 너무나 많은 인간들을 만났다. 다양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빙그르르 돌아가는 회전목마 위에 올라탄 인형들처럼.


그렇게 얼마나 많은 인형을 구경하고

얼마나 많은 회전문을 돌려가며 그 틈새로 본 시커먼 하늘.

어느 순간 그 시커먼 하늘 저 멀리 하얀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하얀 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점은 동그란 면으로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사방으로 조금씩 반사되는 무언가가 보였다.


이 생생한 장면은 제가 잊어버릴까 봐 기억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긴 글입니다. 다시 읽으며, 몇 개월 전에 꿨던 꿈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중입니다.

박선민, 시간의 연결성, 재생 유리기물 250점




얼마 전(실제로) 경주에 있는 솔거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APEC계기 한국미술 특별전 <신라한 향:新羅韓香>인 만큼 ​예술 작품들이 꽤 큰 규모의 공공재 성격을 띠지만, 그 고요함과 정적인 영혼의 전달력은 개인 한 명 한 명에게 색다르고 부드러운 회귀와 죽음의 공명을 담고 있었습니다.


폐유리병을 활용한 업-사이클링 유리 공예가인 박선민 작가님의 작품 세계는 특별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파스텔 톤 컬러의 유리병의 표면은 가우시안 블러 같은 효과처럼 좋아하는 몽환적 상상력을 불어넣고, 여러 겹의 레이어 같은 여러 가지 색 유리병들이 겹쳐 놓여 있는 모습들이 자기 인생 속에서 만나는 인연의 겹, 관계를 떠오르게 했죠.

박선민, 시간의 연결성, 재생 유리기물 250점

미소를 짓는 흑갈색 곱슬머리의 남자가 집 문을 두드리고 찾아왔던 꿈속의 장면들. 낯설음은 모험 같고, 모험은 사람을 설레게 만들어 뜨거운 태양 가까이 갔다가 타오른 이카루스처럼 그 지독한 향연. 어느새 어둡고 차가운 세월이 어색한 기억으로 만들어 공허해졌습니다.


전시장 안에는 일정 간격으로 범종이 울리는 소리가 낮게끔 흘러갑니다.


꿈속에서 회전문을 돌려가며 그 틈새로 본 시커먼 하늘 중앙에서 보인 하얀 점. 그리고 점의 주변으로 점점 퍼져가는 빛무리..


그게 뭘까 했는데 달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박선민 작가님의 유리 조각으로 재가공된 작품들은 제 꿈속의 달빛보다 훨씬 온유하고 따뜻했지만, 거울 너머에 보인 형의 복제, 같아 보여도 물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은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가게 만든 그때의 꿈과 너무 닮아있었습니다.


박선민 작가의 유리 조각들은 내게 '투명해보여도 투명하지 않은 무게'의 영감을 주고 있었습니다. 버려진 병들이 뜨거운 불길 속에서 녹아내려 다시 태어날 때, 그들은 과거의 형태를 잃는 대신 빛을 머금는 새로운 방식을 얻듯이 나 또한 뜨거운 태양에 다가갔던 이카루스의 날개를 꺾고 내려와, 이제는 차가운 달빛 아래에 서 있는 장면.


가공된 유리를 다시 녹여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킨 그녀의 손이 야무지고 세련되어 부럽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도구들을 보면서 붓과 연필에 가장 익숙한 제 감성으론 감당하기 불편한 새로운 세계를 만든 그녀의 창조성이 고유하게 보이면서 삶은 단 한 번의 비행이 아니라,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녹여 아름다운 형상으로 빚어가는 끝없는 재가공의 예술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 길.

노을 지는 하늘은 빠르게 어두워져 갔습니다. 하루의 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스물네 시간의 끝을 따라 가지만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지 않았던 이유는, 지금 순간 감싸는 차가운 달밤의 공명이 완벽했기 때문이거나 현재 자체의 만족감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거나. 분명 둘 중에 하나이거나 둘 다 이거나. 스스럼없이 허물어져가는 대화는 내일의 시간을 앞당기고 싶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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