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스러운 책벌레를 소개합니다
아이의 책 덕후 기질이 절정에 다다른 건 대여섯 살 때였다. 아니, 생각해보면 절정은 지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때는 엄마의 목소리에 의지해서 책을 읽어야 했던 시기여서 나는 그야말로 꼼짝없이 하루 종일 책만 읽어주는 로봇이 되었다. 이쯤 되니 나도 어느 날엔가 오기가 생겨서 '어디 네가 얼마만큼 책을 읽을 수 있나' 싶어 '책 읽어주세요'라는 말에는 절대 No라고 대답하지 않기로 나만의 규칙을 세우고 읽어달라는 만큼 실컷 읽어준 날이 있었다. 그날, 오후 두 시경엔가 예순여덟 번째 책을 읽고 목소리가 잠겨서 더 이상 읽어주고 싶어도 읽어줄 수가 없었는데... 정말인지 그 시절의 내 성대에 안쓰러운 마음을 듬뿍 담아 보낸다. 그 흔한 세이펜도 없이 엄마표 오디오북으로 버틴 7년의 시간. 해외를 전전하느라 한글을 늦게 깨쳤지만 아이는 그만큼 엄마 목소리에 의지해서 책에 푹 빠져 살았다. 이제 그 아이는 자라서 박완서와 미하일 엔데의 소설을 좋아하고, 9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벽돌 책도 금세 읽어버리는 자타공인 책벌레가 되었는데, 어쩌면 그 시간이 지금까지 아이를 이마큼 자라게 한 양분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렇게까지 지나치게 책을 좋아하는 아이를 조금 염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시기도 있었다. 딸아이는 키즈카페에 놀러 가면 방방장이나 볼풀장에 가기보단 구석진 책장에 있는 먼지 쌓인 그림책에 먼저 시선을 주는 아이였다. 바다가 가까운 동네에 살았을 때는 주말에 해변에 놀러 가자고 말하면 "집에서 그냥 빈둥빈둥 책이나 읽으며 쉴래."라는 노친네 같은 말을 내뱉는 다섯 살이었다. 장난감 가게에 데리고 가면 시큰둥하다가 서점에 데려가면 눈을 빛내고,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군것질거리보다 '이거 하면 책 읽어줄게'라는 말이 더 큰 보상으로 와닿는 아이였다. 지금도 여행을 가거나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도 처음 보는 책만 있으면 만사 제쳐두고 책 속에 코를 밖는 아이가 약간 야속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이는 내가 키우고 싶어 하는 대로 자라는 존재가 아닌지라,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아이의 책 사랑을 존중해주는 편이다. 그리고 그 뒤로 네 살, 여섯 살 터울로 두 아이를 더 낳아 키우면서 이러한 책벌레 기질은 내가 키워준 게 아니라 그냥 타고난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스물여섯에 첫 아이를 낳아 키웠으니 주변 친구들보다 비교적 빨리 엄마가 된 편인데, 이제 막 서너 살쯤 되는 아기들을 키우고 있는 주변인들이 '우리 아이도 네 딸처럼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라고 비법을 물어보면, 나는 비법 따위는 없다고 대답한다. 쟤는 그냥 그렇게 태어난 애야. 동생들은 안 그래.라는 말로 일축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 일곱 살 둘째가 한글을 깨치고 이제는 꽤 글밥이 있는 책들을 혼자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이 아이에게도 꽤 그럴싸한 책 덕후 기질이 있다는 걸 느껴가는 중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라고 늘 대답했지만 사실 우리 집에 오면 누구나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겠네"라고 말한다. 책벌레 딸의 호응에 힘입어 그동안 모아 온 아동용 책이 수천 권이 넘는데, 해외로 이사할 때마다 욕심내어 책을 가득히 실어왔는데도 매달 한 번씩은 한국에서 책 택배를 받으며 신간이 꾸준히 업데이트되고 있다. 대체 몇 권의 책이 우리 집에 있는지 일일이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어느새 집안의 책은 무한 증식하여 지하실에서부터 부엌에까지 모든 곳은 책에 점령당하고, 심지어 한 겹이 아닌 두 권으로 책을 쌓아도 책장이 모자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중에 약 4천 권 정도가 어린이책으로 추산되는데, 덕분에 필요한 책이 있으면 도서관이 아니라 우리 집에 찾아오는 지인들도 심심찮게 생겼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나는 어쩌면 꽤 괜찮은 '책 육아'를 해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법'을 알려달라는 주변인들의 말에 그런 건 없어,라고 대답했지만 나도 모르는 새에 10년 넘게 아이들과 책에 풍덩 빠져 살면서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비법과 요령이 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나름의 어린이책을 큐레이션 하는 요령도 생겼고, 도서관 대신 우리 집을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할 만한 어린이책도 알고 있다. 무엇보다 이제 열한 살이 된 아이의 인생에 '책'이라는 물건은 확고한 기쁨의 존재로 자리 잡았다. 나도 어디서든 '책 좋아해요.'라고 말해도 부끄럽지는 않을 수준으로 삶에서 책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지라, 이 책의 세계를 아이와 공유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지극한 행복을 느끼고 있다.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배달되어 온 날, 누가 먼저 읽을지를 두고 옥신각신 다투다가(사실은 다투는 척하다가) 널 사랑하니까 이 엄마가 순서를 양보하는 거야,라고 눈을 흘길 때 딸아이가 찡긋 지어 보이는 눈웃음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지난 10년 동안 해온 '책 육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책으로 어떤 학습적인 효과를 기대한 것도 아니고(실제로 우리 딸은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데도 한글을 아주 늦게 배웠다), 꼭 책을 읽어야 한다고 의무적으로 강요하거나 보상을 해준 적도 없지만 그냥 어쩌다 보니 책을 좋아하는 아이를 키우면서 책 육아를 했고 책 육아를 하고 있다. 이제 다섯 살 막내까지만 책벌레로 키우면 모두가 책을 읽느라고 절간처럼 조용한 집이 완성되겠지? 하고 음흉한 꿈을 꾸고 있는 엄마. 그 책벌레 엄마의 책 육아 경험담을, 지금부터 연재해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