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남편의 미국 유학은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었다. 원래 결혼할 때부터 우리 부부는 함께 유학 가길 꿈꿨다. 어쩌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외로 삶의 터전을 옮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신혼살림을 매우 단출하게 꾸렸다. 미뤄지는 남편의 유학 지원(남편은 자비유학이 아닌 회사에서 학비지원을 받아 학술 파견을 나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에 맞춰 내가 일단 한국에서 석사학위까지는 취득하기로 마음을 바꾸고 국내대학원에 지원했을 때도 지도교수님의 첫마디는 "넌 원래 유학 간다고 하지 않았니?" 하는 것이었다. 학부시절 내내 해외의 석박사 통합과정에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연구실에서 포트폴리오를 쌓았고 미리 추천서까지 부탁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사과정 중에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 휴학과 육아 휴학을 하고, 그러느라 석사 과정이 길어지고, 그리고 그 논문 심사를 앞두었을 때, 아주 오래전 기억 속에 까마득하게 잊히고 있었던 남편의 유학 지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1년 뒤 유학을 떠나는 것을 전제로, 남편은 회사 업무보다 유학 준비에 더 매진하게 되었다. 토플이나 GMAT 등 대학원 지원에 필요한 영어점수를 획득하기 위해 회사 기숙사에서 합숙을 하며 공부를 하고, 지원서를 준비하고, 시험을 치고 면접을 보고, 그러나 본분은 회사원이기 때문에 수업이 없는 날은 사무실에 나가고,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이 이어졌다.
6월에 무사히 논문 심사를 마치고 8월에 석사학위를 취득한 나는... 고학력 전업주부가 되었다. 1년 뒤로 예정된 남편의 유학과 해외이사를 기다리며.
스탠퍼드 대학교 경영대학교 사상 최초의 여성 교수이자 페미니스트 경제학자인 마이라 스트로버의 저서 <뒤의 올 여성들에게>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수십 년 전 마이라 스트로버는 둘째를 임신한 몸으로 막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아이를 출산하고, 두 살 터울의 두 아이를 키우며 학위 과정을 마무리하는데, 그즈음에 그녀의 남편이 군 복무를 끝내고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레지던트로 일하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박사학위를 취득했던 삶의 터전이자 학술적 토양이었던 미 동부 메릴랜드를 떠나 남편을 따라 미 서부로 갑작스럽게 이사를 하게 된다. 스탠퍼드 근처의 몇 군데 학교에서 교수 자리를 알아보지만 캘리포니아에는 그녀에게 교수 자리를 소개해줄 만한 인맥도 없는 데다가 아직 어린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젊은 여성을 조교수로 채용하려는 대학은 아무 곳도 없었다. 그녀는 "우리는 캘리포니아로 이사했고, 나는 일자리가 없는 상태였다."라고 덤덤하게 이야기하며 그 시기의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유리한 입장에 있는 지금에야 내가 얼마나 순종적이었는지 놀랄 따름이다. 하지만 뒤돌아 따져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진실은 그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보여주는 모델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교육을 아주 많이 받은 전문직 여성조차 남편을 따라 움직였다. 남편의 커리어가 우선이었다. 나는 순종적으로 살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다. 돈 잘 버는 남편을 둔 여성은 아이를 보며 집에 있어야 한다는 관습은 비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존재하는지도 깨닫지 못한 관습을 비웃는 것은 불가능했다. 샘과 나의 의사 결정 방식은 평범해 보였다. 나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자연스럽게 기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랬다. 나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자연스럽게 기대하는 방식이었다. 단 한 번도 다른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남편을 따라 유럽으로 거처를 옮기며 '주재원 와이프'가 된 지금도. 남편의 커리어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그대로 멈춰있었다.
커리어에 대한 계획이 멈춰 선 지점에 자연스럽게 둘째에 대한 계획이 파고 들어왔다. 그래, 지금이야말로 둘째 임신을 준비할 시기였다. 최고의 터울은 과연 몇 살 차이일까? 하는 고민과 더불어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미국으로 이사를 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임신한 채로 미국으로 이사가 해외에서 아이를 낳는 게 나을지 하는 고민이 더해졌다.
계획하면 계획한 대로 바로 삼신할머니가 아이를 점지해줄지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무계획보다는 나으니 남편과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논의했다. 세 살 터울이 나을까, 아니면 네 살 터울이 나을까. 세 살 터울이면 온갖 졸업식과 입학식 날짜가 겹쳐서 첫째도 둘째도 서로 서운해하고 힘들어하는 데다가 덩달아 부모가 힘들어진다는데. 게다가 지금 바로 임신을 한다 해도 둘째가 백일도 되기 전에 해외이사를 감행해야 하는데 시기적으로 아기가 너무 어리고 힘들지 않을까. 그보다는 해외에서 출산을 하는 게 여러모로 힘들지라도 임신한 채로 이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다, 세 살 터울이든 네 살 터울이든 지금부터 아이를 가지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그래도 더 터울지기 전에 아이를 금방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계획한다고 해서 계획처럼 그렇게 금방 아기를 임신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이번에는 그래도 여러 가지 준비를 하겠다고 풍진 예방주사도 맞고, 대학병원에서 종합 건강검진도 받았다. 계획임신을 하겠다고 배란일 테스터기도 사고, 엽산도 구매해서 미리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즈음 해서, 임신 계획을 어그러트리는 일이 두 가지 발생한다. 하나는 생각보다 종합 건강검진에서 추가 검진을 해야 할 항목이 많았던 것이다. 나는, 고작 20대 중반밖에 안된 나는, 종합 건강검진에서 그렇게 빨간 불이 많이 들어올 줄 몰랐다. CT촬영부터 시작해서 추가 검진을 해야 할 방사선과 검진이 꽤 많았다.
다른 또 하나는, 어느 날 입이 벌어지지 않았던 것인데, 턱관절 뼈가 모두 삭아서 턱뼈가 탈골된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누적된 몸의 긴장과 스트레스로 인해 그랬던 것이라 했는데, 주변 근육을 부드럽게 만드는 주사를 맞고, 마우스피스를 끼고 생활하며 턱뼈가 다시 자라나길 기다려야 했다. 뼈가 얼마만큼 회복되었는지는 주기적으로 엑스레이를 찍어야만 알 수 있었으므로 완치 판정이 날 때까지는 임신해서는 안 됐다.
어영부영 치료를 받으며 반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갔다. 겨우겨우 모든 방사선과 검진을 마치고 이제는 드디어 임신을 해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을 때, 그리고 배란일 테스터기에 선명한 두 줄이 뜨며 오늘 드디어 숙제를 해야 하는 날이라고 내 몸이 외치고 있었을 때,
남편은 카자흐스탄으로 해외출장을 가고 없었다.
그 집을 비우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 내 뱃속에는 생긴 지 딱 이틀 된, 아마도 그저 작은 세포에 불과했을 둘째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