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큰애가 다니는 국제학교 학부형들의 간단한 커피 브레이크가 있었다. 모두 아이들을 보내고 홀가분하게 오셨지만, 나는 4살, 6살 쪼꼬미들이 유치원을 다니지 않고 홈스쿨링을 하고 있는지라 모임에 데리고 갔는데, 바리바리 챙겨간 색연필과 스티커 덕분에 평화롭고 우아하게 커피 모닝을 마칠 수 있었다. 거진 4주 만에 외부인들을 만나는 날이라 모처럼 화장도 예쁘게 하고, 어깨까지 닿을듯한 치렁치렁한 귀걸이도 걸고 나름 한껏 꾸미고 나갔다.
모임이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나를 처음 만난 어떤 엄마가 말했다."제가 알고 지내는 애셋 엄마 중에 제일 멀쩡하세요." 모두들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날 아이들은 예의 바르고 얌전했고(아마 정말 오랜만의 외출이라 아이들도 기분이 좋아서 엄마 말을 잘 들은 것 같다), 나는 식당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조곤조곤 아이들이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물론 그때 이미 커피타임이 한 시간쯤 지냈을 때라 나는 속으로 '이제 슬슬 한계점에 도달한 것 같은데...'라고 초조해했지만, 아직까지는 우아한 엄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한 시간 반 만에 끝난 커피 모닝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에서야 아이들은 배고픔과 지루함을 호소하며 원래의 그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지 않은 것처럼 우아하게 오늘의 모임을 마칠 수 있었던 것에 안도하며 아이들에게 설탕이 듬뿍 뿌려진 과자를 상으로 선사했다. 그리고 귀걸이를 풀고, 편안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아침에 열심히 드라이한 머리도 질끈 묶으며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늘 들었던 '멀쩡하다'는 말은 다소 직설적이었지만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아요. 외동 엄마 같아요. 혹은 애가 넷이어도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말들은 내가 '삼남매 엄마'의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꾸준히 들어왔던 말이다. 특히 넷째를 낳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권고는 셋째를 막 출산하고 난 뒤, 내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업체에서 파견되었던 입주 산후도우미 입에서 처음 들었다. 나는 셋째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는 무려 넉 달 동안이나 산후도우미를 썼는데, 생후 2개월 때부터 새롭게 고용한 출퇴근(9시부터 6시까지만 도와주는) 산후도우미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동생이 하나 더 있어도 참 다복하고 좋을 것 같네요." 그때 많이 의아했었다. 아직 셋째가 채 태어난 지 백일이 되지 않았는데 왜 자꾸 저에게 넷째 이야기들을 하시는 건가요. 그것도 잠깐씩 얼굴만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아니라 나의 24시간 일상을 속속 들여다보고 계신 분들께서. 그러면 하나같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이렇게 여유 넘치는 셋째 엄마는 처음 본다고. 육아스트레스가 하나도 없는 것 같다고. 애가 몇 명 더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
우리 집에 출퇴근으로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오신 아주머니는 산후도우미 업체에서만 10년을 일하고, 본인이 직접 파견업체를 운영한 적도 있었던 베테랑이라 지금까지 만난 아기 엄마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 전문가가 나의 엄마다움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서 왜 나는 힘들어 보이지 않을까...의아했다. 그때는 심지어 갑상선 저하증이 꽤 심할 때라, 기준치의 4배까지 치솟은 항호르몬 반응 때문에 몸도 팅팅 붓고, 얼굴엔 피로감이 가득하고, 모르긴 몰라도 환자 같은 면모가 가득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내가 여유가 넘쳐 보인다니. 그렇다면 다른 엄마들은 대체 얼마나 힘들어보였다는 걸까.
그런데 그로부터 몇 달 후, 어차피 어린아이들을 키우느라 잠시 쉬어가는 이 시간에 아이 셋 엄마 말고 다른 커리어에 대한 준비를 꾸준히 하고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심리전문가에게서 진로상담을 받게 되었다. 연우 심리 개발원에서 제작한 U&I 진로검사를 받았는데 보고서에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이나 일상적인 일에 대한 인내력이 매우 강합니다.
상담사는 이 문장을 콕 집어, 엄마의 일 그리고 전업주부의 일이 내게 적성에 잘 맞을 거라고, 그래서 아마 나는 현재 일상에 대해서 큰 불만이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이나 일상적인 일로만 채워진 것이 바로 엄마와 주부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고, 매일 아이를 입히고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 어제 청소를 했는데 오늘 또 청소를 하고 내일 또 청소를 하는 지루하고 반복적이며 해도 티가 나지 않는 집안일. 이런 것들을 절대 못 견뎌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셨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찌 보면 육아가 적성에 맞는 셈이었다.
그러자 의아함이 풀렸다. 나는 내심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을 보면서 그들의 피곤하고 지친 일상이 충분히 짐작되면서도 저게 저렇게까지 괴로울 일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던 적이 있었다. '애보느니 밭맨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저는 절대 집에 애들이랑 있을 수가 없어요. 미칠 것 같거든요.'라며 끊임없이 바깥으로의 탈출을 도모하는 엄마들이 있었다. 한때 나는 그런 엄마들을 좀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책임감이 없어. 인내심도 없고. 그런데 그건 모성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그 사람이 유별나서도 아니었다. 그냥 아이들의 기질이 제각각 다 다른 것처럼 엄마의 기질도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엄마에게는 육아가 체질에 맞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육아 체질인 엄마는 흔하지 않다고 하셨으니 '애를 셋이나 키우는데도 여유가 넘치고 멀쩡한 엄마'와 굳이 나 자신을 비교해가며 좌절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내가 굳이 거기서 우월감을 찾으려 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육아서는 넘쳐나면서 '엄마도 그대로 사랑해주세요.'라는 책은 왜 없을까.
엄마만큼 제대로 된 퇴근도 없고, 보상도 없고, 많은 희생이 강요되는 직업은 없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적성과는 무관하게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고, 또 엄마로 살아간다. 그렇지만 고소공포증을 가진 사람이 비행기 조종사가 되지 않는 것처럼, 피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외과의사가 되지 않는 것처럼 육아 체질이 아닌 엄마들에게 조금 너그러워지면 어떨까. 엄마 됨의 기준을 높게 세워두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모성이 부족하다며 손가락질하는 사회. 그러나 엄마도 적성에 맞아야 한다. 다른 모든 직업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