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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by 주정현

한 번 빠져들면 수백 시간은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영상의 바다, 넷플릭스. 이 끝없는 보물창고 속에서 내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장편영화도, 시즌제 드라마도 아닌 단 12분짜리 짧은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제목은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원제는 <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


10년 전 엄마가 된 이후로 내게는 삶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두려움이 하나 생겼다. 바로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 사고가 되었든 질병이 되었든 나는 혹여라도 내 아이가 내 곁을 떠나게 될까 봐 두렵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나는 엄마가 된 이후로 단 한시도 그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것 자체도 무섭다. 나는 입 밖으로 꺼내는 말에는 신비한 힘이 있어서, 그것이 현실화되는 데 어떤 식으로든 보탬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안에 있는 이 두려움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밖으로 꺼내놓아야 하는 이 일련의 끔찍한 단어들을 마주하는 것마저 두렵다. 때때로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을만치 큰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위로하기보다는 그들과 잠시 거리를 두려 한다. 그 행동이 옳은 일이라는 건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혹여라도 그 불행이 나에게로 옮겨올까 봐, 나에게도 그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올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내게도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불편하다. 영화를 클릭하기 전, (너무나 심플해서 읽지 않을 수 없는) 짧은 소개글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에서 누군가 총을 쏘았다. 아이가 희생됐다. 남겨진 부모의 나날." 영화의 첫 장면은 아이가 없는 적막한 식탁. 영화가 시작되자,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앞으로 남은 12분 동안, 나는 어느 지점에서든 내 감정이 무너져 내릴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영화를 보아야 하는가. 입 밖으로 꺼내놓기도 주저하는 불행한 사건을 굳이 영상으로까지 마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이야기는 나에게는 가장 두려운 '가상의 시나리오'일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현실'이다. 원망과 후회, 상실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과거의 그 순간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미래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그 순간을 매일 복기하며 사는 현실. 세상이 우리에게 한 이 끔찍한 짓을 좀 보라고 비명을 지르는,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삶. 그런 인생을 마주하게 된 부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영화는 고통으로 시작해서(If anything happens), 사랑으로 끝난다(I love you). 떠나간 빈자리의 슬픔과 원망과 증오가 지배하는 삶. 그러나 그 고통으로부터 언젠가는 벗어나야 한다. 어찌 됐든 삶은 계속되니까.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 상처를 그저 짊어지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갈 뿐이다. 앞으로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그렇다면 그 아픔을 짊어지고, 혹은 보듬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라는 형식은, 그리고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라는 조금 순화된 장르는 당장의 감정적인 폭풍 속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최소한의 심리적, 주관적 거리를 두고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의연하게 이 영화를 시청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8분 25초 지점에서 나는 무너졌다.


나는 비슷한 슬픔을 겪은 개인들이, 혹은 겪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구원하는 소통의 창구가 되기 위해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가족을 영영 떠나보내는 것, 특히 내 분신과도 같은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은 살아가는 동안 도저히 겪지 않았으면 하는 고통이라 누군가는 입 밖으로 꺼내기도 주저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피하고 싶은 운명을 겪어야만 했고 그래서 이야기가 되풀이될 때마다 타인의 불편한 심사를 마주해야 한다. 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필요할 때 함께 슬퍼하고 연대하며 누구보다 예민하게 공감해주는 목소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영화를 보며 필연적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2014년 4월 16일의 차가운 바다가 떠올랐다.

우리에게는 아직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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