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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격리_단상

by 주정현

오늘로 해외 입국자 자가격리 열흘째. 어느새 지나간 격리 일수가 두 자릿대로 접어들었다.

주말과 주중의 구별이 없는 생활 덕분에 날짜와 요일 감각이 무뎌졌다.


모든 해야 할 일과 약속을 일단 나중으로 미뤄두고,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뭐든지 나중으로 미룰 수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 병원 예약이나 친구들과의 약속 같은 것들이 하나둘씩 스케쥴러에 채워지고 있지만, 격리 해제일까지는 아무도 만날 수 없으니 이번 주까지는 모든 일정이 비어있다. 달력의 텅텅 빈 공간만큼이나 내 마음도 가볍다.


격리는 친정집에서 하고 있다. 매일 출근을 하시는 아버지는 따로 숙소를 얻어 나가시고, 어머니가 함께 지내며 이것저것 편의를 봐주신다. 만약 나 혼자 아이 셋을 돌봐야 하는 일상이었으면 이 시간이 너무 지겹고, 힘들고, 짜증 투성이었을 텐데... 아이들도 봐주고 살림도 해주시는 어머니 덕분에 한결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지내는 중이다.



지금 지내고 있는 이 집으로 이사 온 건 내가 열두 살이었던 해의 겨울이었다. 이전까지는 여기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같은 아파트 단지의 다른 동에서 살았다. 이전에 살던 곳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아파트였고, 그중에서도 가장 아래층 세대에 살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어릴 땐 내가 전교생 중에서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집에서 산다는 묘한 자부심이 있었다. 수수깡이나 색종이 같은 미술 준비물을 깜빡 잊고 집에 두고 올 때면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몰래 교문 밖으로 나가 급한 대로 학교 앞 문방구에서 준비물을 사 왔지만, 나는 그 문방구보다도 집이 더 가까웠기 때문에 10분도 안 되는 쉬는 시간에 충분히 집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집으로 이사 오면서 아쉽게도 그 편의는 더 이상 누릴 수 없었고, 학교 준비물을 빼놓고 오는 날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친구들처럼 비상금을 털어 새로 준비물을 구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싫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예전에는 하굣길에 교문을 나서자마자 채 1분도 안 되어 아쉬운 마음을 가득 안고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해야 했는데, 집에서 학교까지 통학거리가 제법 길어지자 함께 걸어가는 길동무가 생겼다. 바로 앞집에 살던 P양과 우리 집을 지나서 5분 정도 더 걸어가야 하는 빌라에 살고 있던 S양,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항상 하굣길을 함께하는 친구였는데, 5학년 때도 6학년 때도 우리는 모두 같은 반이어서 2년 내내 집에 가는 길이면 꼭 붙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 가는 길에 둘러둘러 구멍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날씨 좋은 날이면 놀이터에서 한참 놀기도 했다. 이전에는 워낙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가까워 '하굣길'이라 부를 만한 공간이 전혀 없었는데(교문에서 스무 걸음만 걸어가면 집이었다), 고학년이 되어 새롭게 등장한 하굣길 오락에 정신을 못 차리고 일탈(?)을 즐겼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핸드폰도 없고 삐삐도 없어 집에 연락할 수단이 없던 그 시절에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으레 한 시간씩 길에서 노닥이던 우리를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셨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이 집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의 내 나이가 딱 지금 큰애의 나이와 똑같다. 연락 없이 길에서 한 시간씩 소식이 두절되어도 어디선가 잘 지내겠거니 하고 안심이 되는 나이... 는 절대 아니다. 세상이 바뀐 건지 아니면 내 간이 콩알만 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아이를 집에서 혼자 내보내기엔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아이는 보호자 없이 단 한 발자국도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는 키즈폰 하나 손목에 채워주고선 혼자서 집 밖으로 잘도 내보냈다. 초등학교가 아파트 단지 내에 있었고,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에는 차도가 없었다. 아이는 하굣길에 집 앞 놀이터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엄마에게 문자 한 통을 보내 두고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라는 전화가 오면 5분도 안 되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막내가 갓 돌을 넘겼을 무렵이었고, 나 혼자 세 아이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힘들었던 시기라 큰애 하나라도 혼자 독립적으로 나가 놀면 그야말로 '땡큐'였다.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만큼 동네 인맥도 넓어서 비슷한 나이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 친구들이 많았고, 놀이터에 보는 눈이 많으니 혹여라도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녀들의 전화가 재깍재깍 날아왔다. 나름 안전한 공동체에서 안심하며 아이를 키웠다.


아이를 혼자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게 된 건 폴란드로 이사 온 이후부터다. 동양인 혐오가 심한 나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나라도 아니었고, 일단 혐오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동양인 자체가 너무 드물기 때문에 어디에서든지 그 존재만으로 너무 튀었다. 아이가 아닌 성인인 나도 그냥 '동양인 젊은 여자'여서 길 가다가 이상한 해코지를 당한 적이 있었고, 아직까지도 여전히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별다른 이유 없이 날갯죽지에서부터 소름이 삐죽 돋는다. 아무리 안전한 주택가라고 할 지라도 어린 동양인 여자아이가 보호자 없이 혼자 길을 걷고 있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아이는 늘 항상 대문 바로 앞에서 스쿨버스를 탔고, 주말마다 가는 한글학교는 걸어서 5분 거리이지만서도 부모 중 한 명이 항상 동행했다. 시 외곽에 있는 국제학교에 다니는 만큼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사는 친구가 전혀 없었으므로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항상 엄마나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가까운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 물건을 사러 다녀온 적도 없는데, 자기 이름을 대면 지정된 밀 플랜에서 금액이 빠져나가는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소소하게 음료수나 간식을 사 먹는 게 아이가 직접 해 본 경제활동의 전부이다.




쭈욱 한국에 살고 있던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은 이제 혼자서 지하철을 타 본다거나 제법 먼 거리의 할머니 댁에도 혼자 다녀오는 등, 자신만의 모험 능력을 하나둘씩 키워나가는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발에 흔하게 채일 정도로 많은 편의점들 덕분에 친구와 하굣길에 용돈으로 간식을 사 먹는 경험은 이미 그 나이에 제법 여러 번 해 봤을 거다. 왠지 우리 아이만 유치원생의 그 수준에 머물러있는 것만 같다. 내가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엔 학교-집-학교-집 밖에 모르던 모범생(?)이었던 것처럼.


격리가 끝나고 외출이 가능해지면 아이는 자신이 아주 평범해지는 이곳에서 혼자만의 모험을 해 볼 수 있을까? 오천 원짜리 한 장 쥐어주며 '콩나물 한 봉지만 사 오렴'하고 심부름을 시키면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한국에 있는 여름방학 동안에만 일주일에 천 원씩이라도 용돈을 한 번 줘볼까? 자유로운 외출을 얼마만큼 허용해주면 좋을까. 그렇다고 낯선 동네에서 무턱대고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방학은 짧고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일지 머리를 굴려본다. 텅텅 빈 스케쥴러에 내 일정만 빼곡히 채워넣을 게 아니라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경험도 하나씩 넣어줘야 할텐데, 이제는 엄마나 동생들과 같이 붙어있기 보다는 혼자서 무엇이든 해보고 싶어할 나이다. 사춘기가 임박한 초등학교 고학년, 어려운 나이다. 하긴, 육아에 절대적으로 쉬운 나이란 없는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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