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을 읽고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을 드디어 끝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든 첫 번째 감정은 감동이나 여운보다는 안도에 가까웠다. 두 권의 두꺼운 분량, 낯선 인도의 현대사, 그리고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복잡한 미로 속에서 나의 독서는 유독 더디고 고단했다. 인도를 향한 동경이나 기초 지식 없이 뛰어든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나는 평소 도스토옙스키의 깊이 있는 인간의 심연에 대한 묘사나 헤세의 내면 탐구와 깨달음을 사랑하는 독자다. 나에게 고전이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처럼 인간의 내면을 수직으로 파고드는 정적인 탐구이거나 <싯다르타>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진리를 찾아 떠나는 고요한 여정이었다. 두 작품 모두 세계의 소란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인간의 안쪽으로 침잠한다. 나는 그런 문학을 자연스럽게 '깊이 있는 문학'이라 여겨왔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루슈디의 소설에 뛰어들었다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표류했다.
이 소설은 내면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인도 독립의 순간에 태어난 주인공 살림은 국가의 운명과 신체적으로 결합된 존재처럼 그려진다. 그의 코는 타인의 감정을 냄새로 감지하고, 그의 기억은 인도의 역사와 함께 균열하며, 그의 몸은 소설의 끝에서 문자 그대로 부서진다. 이러한 설정은 개인의 내면이란 국가와 역사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채 존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낸다.
싯다르타가 바라본 강물이 고요한 깨달음을 준다면, 루슈디의 강물은 온갖 오물과 신화와 정치적 격변이 뒤섞인 갠지스강에 가깝다. 내면의 깊이를 즐기는 나에게 이 인도식 수다와 역사의 소란스러움은 다소 결이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사건은 보모 메리가 주인공 살림과 그의 숙적 시바의 요람을 바꿔치기한 순간이다. 사회주의자 연인의 “부자는 가난해져야 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저지른 그녀의 선택은 거창한 혁명처럼 보이지만 결국 한 개인의 사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충동에 가깝다. 이 장면이 강렬한 이유는 단순히 아이러니 때문이 아니다. 살림이 평생 짊어진 ‘인도의 아들’이라는 운명, 그가 누리는 정통성, 시바가 품게 된 폭력성과 분노, 이 모든 것이 한 여인의 사소한 선택 위에 세워진 허구라면 우리가 믿는 출신과 계보, 역사적 필연성은 과연 얼마나 견고한 것일까. 이 장면은 국가의 서사가 얼마나 우연하고 취약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읽힌다.
여기서 나는 이 소설이 단순한 역사 우화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루슈디가 겨냥하는 것은 역사 서술 그 자체의 신뢰성에 가깝다. 살림은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과장하고 왜곡하며 독자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이 틀릴 수 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서사적 결함이 아니라 의도된 장치처럼 보인다. 역사란 언제나 누군가의 목소리로 쓰이며, 그 목소리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편향되어 있다는 것. 살림의 기억이 흔들릴수록 인도의 공식 역사 또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제하고 있는지가 함께 드러난다.
또한 '한밤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천 명의 능력자들이 인디라 간디의 비상사태 속에서 말살되는 과정은 이 소설에서 가장 서늘한 대목이었다. 루슈디가 선택한 폭력의 방식이 강제 거세라는 점은 단순한 잔혹함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 자체를 뿌리째 제거하는 행위,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없도록 존재의 씨앗을 지우는 행위다. 아이들이 끝내 연대하지 못했다는 것, 각자의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공동의 언어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이 말살을 가능하게 했다. 루슈디는 인도의 실패를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책임을 권력자뿐 아니라 가능성을 가졌던 이들에게도 조용히 되묻는다.
이 소설을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부르지만 읽으면서 점점 그 분류가 서구의 시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인들에게 신화와 현실, 초자연과 일상이 뒤섞이는 방식은 낯선 기법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내가 비현실적이라 느꼈던 장면들이 오히려 그 사회를 이해하는 데 더 가까운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낯섦은 종종 나의 시야와 기준이 얼마나 좁은지를 드러낸다.
나는 그동안 역사와 지리에 대한 무관심을 취향이라 포장해 왔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것이 취향이 아니라 외면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세상에 대한 이해 없이 인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의 심연도 19세기 러시아라는 토양 위에서 자란 것이고, 헤세의 고요한 여정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과한 인간의 절박한 탈출 서사였다. 내가 순수한 내면이라고 여겼던 문학조차 결국 역사라는 외부 세계와 단절될 수 없음을 루슈디는 소란스럽게 일깨워주었다.
비록 이 작품이 ‘부커 오브 부커스’라는 찬사를 받는 고전일지라도 나에게 그것은 끝까지 편안한 옷이 아니었다. 그 불편함은 끝내 해소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억지로 해소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이 불편함이 가르쳐준 것이 있다. 내가 문학에서 찾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문학에서 회피해 온 것이 무엇인지. 어떤 책은 읽고 나서 더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좁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루슈디의 소설은 나에게 후자였다. 이제 나는 다시 도스토옙스키를 읽더라도 그 영혼의 고통 뒤에 흐르는 시대의 소음까지 함께 들으려 노력하게 될 것이다. 나의 좁음을 확인한 것, 그것만으로도 이 고단한 독서의 이유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