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원형이다
요즘 나는 '평온하지만 뜨거운 삶’이 가능할까를 자주 생각한다. 니체를 좋아하지만 끝까지 따라가자니 숨이 가쁘고 어느 순간엔 그의 사상이 삶을 몰아붙이는 채찍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 내게 헤르만 헤세의 소설은 언제나 조금 다른 온도로 다가온다. 니체의 철학을 품고 있으면서도, 헤세는 그 날 선 사상을 동양 철학으로 한 번 감싸 보다 유하고 부드럽게 풀어낸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늘 나와 내적으로 결이 잘 맞는다.
<유리알 유희>는 헤세의 마지막 소설이다. ‘말년의 헤세는 무엇에 도달했을까’라는 기대감과 2권짜리 대작이라는 부담이 동시에 있었지만 망설임 없이 읽기 시작했다.
작품 속 가상의 세계 카스탈리엔은 세속과 단절된 지적 수도원이다. 영특한 아이들을 선발해 평생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도록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는 창조적 행위가 없다. 그들은 기존의 지식을 분석하고 조합하며 유희할 뿐이다.
이 설정은 흥미로우면서도 의문을 남긴다. 니체적 관점에서 보자면 창조가 거세된 불완전한 조직인 셈인데 어쩌면 헤세는 의도적으로 창조와 현실이 없는 세계는 지나치게 깨끗하고 완벽하지만 생명력이 없다는 한계를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소설의 구조 또한 독특하다. 유리알 유희에 대한 서문으로 시작해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가 이어지고 마지막은 그가 남긴 유고로 마무리된다. 독자는 크네히트의 삶을 따라가며 헤세가 전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와 철학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개념은 ‘명랑성’이다. 이는 단순히 밝고 쾌활한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인생의 고통과 허무를 끝까지 통과한 뒤에야 도달할 수 있는 상태,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투명한 하늘 같은 평온함에 가깝다. 헤세가 추구한 삶의 목표는 어쩌면 이 명랑성에 있었던 것 같다.
욕망의 추진력을 참된 곳으로 모은 사람은 격정적이기보다 오히려 평온해지며 근원에 이르는 길은 불안에서 평온으로 가는 길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는 니체의 사상과는 다소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평온 속에 뜨겁게 타오르는 정열을 품은 채 창조하는 삶, 그것이 헤세가 그린 인간의 이상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서 음악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도 최고의 유희로 다뤄진다. 이는 아마도 수학적 엄밀함이라는 이성적 요소와 예술적 감성을 동시에 품은 복합 예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음악은 연주되는 순간 가장 찬란하게 빛나다가 곧바로 사라지는 ‘찰나의 예술’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음악은 인생과 닮아 있다. 인생 역시 매 순간의 연주가 모여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니까.
헤세의 <싯다르타>가 강물을 매개로 삶을 성찰했다면 <유리알 유희>는 음악을 통해 삶의 덧없음과 그 안에 깃든 영원을 말하는 듯하다.
이 작품에는 헤세의 철학이 집약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인생을 직선이 아닌 ‘원형’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특히 인상 깊다. 인생이 직선이라면 삶에는 정해진 길과 정답이 존재할 것이다. 소위 우리가 인생의 각 단계라고 부르는 좋은 학교, 좋은 직업, 결혼, 출산, 육아, 부와 명예를 모두 차례로 얻는 그런 직선 위의 삶 말이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각자의 삶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계절이 매년 돌아오듯 인생의 고민도 반복된다. 명인이었던 크네히트가 다시 가정교사로 내려가는 것도 직선의 삶에서는 추락으로 보이지만 원형의 삶에서는 삶의 고리를 완성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다만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을 떠나 한 사람만을 위한 교육을 택하고 깨달음과 삶에 대한 전수를 원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결말은 갑작스럽고 가혹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니체의 창조적 파괴를 헤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본다. 안정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살아있음을 느끼며 타인을 깨우치는 삶, 그것은 니체의 사상을 한 사람을 향한 헌신으로 좁혀 구현한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찰나의 소멸이자 또 다른 생성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불교의 윤회나 니체의 영원회귀와 닿아 있는 거대한 순환의 일부이며 인생을 원형으로 본 헤세의 관점에 맞는 결말일지 모른다.
마지막에 실린 세 편의 유고는 오히려 본문보다 헤세의 철학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대와 문화는 다르지만 인간이 겪는 본질적인 허무와 고민은 늘 같다는 것, 그리고 스승과 제자, 지성과 감성, 속세와 수행 같은 상충하는 요소들의 합일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싯다르타>가 많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의 헤세가 개인적인 삶의 깨달음을 추구했다면 말년의 헤세는 그 깨달음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고자 하는 사회, 교육적 측면에서 이 작품을 쓴 것 같다.
헤세는 니체처럼 무작정 "자신을 넘어서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좀 더 세상과의 조화, 자연의 신비로움,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힘에 대한 감각을 함께 녹여낸다. 각자가 타고난 자질을 인정하고 삶을 경험하며 깨닫고 서서히 스스로를 초월하라고 권한다. 그 태도는 훨씬 신사적이고 인간적이다.
"우리는 모두 그저 인간일 뿐이고, 각자가 하나의 시도이며 과정일 뿐이다."라는 문장은 인생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금 정립하게 해 준다.
<유리알 유희>의 카스탈리엔 생활을 보며 AI 시대의 우리 모습도 겹쳐 보였다. 어쩌면 우리 역시 그들처럼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벌지 않으면서 지루하지 않기 위해 학문이나 유희로 시간을 채우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카스탈리엔이 선택된 소수의 세계라면 앞으로의 우리는 '모두'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때 우리가 맞닥뜨릴 질문은 크네히트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남은 진짜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 단순히 철학과 예술, 유희만은 아닐 거라는 결론을 이 책에서 알려주고 있다. 지적 유희를 넘어서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어떻게 다음 세대로 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니체가 주는 서늘한 긴장감에서 잠시 벗어나 헤세가 보여준 평온한 정열을 느낀 시간이었다.
인생에는 정답도, 명확한 의미도 없을지 모른다. 그저 세상에 태어나 이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삶을 희로애락으로 바라보는 인간 중 한 사람으로, 나의 이런 고뇌가 과연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은 욕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 욕구를 독서를 통해 다독인다. 삶을 직접 겪으며 얻는 깨달음도 소중하지만 나보다 먼저 삶의 파고를 넘었던 이들의 사유를 책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한다.
이제 헤세를 잠시 내려두고 또 다른 작가의 가르침을 받아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