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수상 그림책
사실 이 책 앞뒤로 한권씩, 세 권의 그림책을 그리고 나서 그림책 그리는 일을 계속 해야 하는지 고민 되었습니다. 그리는 일은 즐거웠지만 한권을 완성하려면 어지간히 집중해도 몇달씩 걸리는데다 화료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림책을 그리면서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유지하려면 다른 생업을 찾아 어렵게 병행해야 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다시 자리에 앉아 붓에 밝은 에너지를 찍어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엄마아빠의 작은 비밀’은 ‘학교가기 싫은 선생님’에 이어 글작가 박보람 님과의 두번째 작업입니다.
박보람 작가님의 글은, 그림은 알아서 잘 부탁드린다는 느낌으로 시각적인 묘사가 거의 들어있지 않은 점이 좋았습니다. 글로써 정해버린 이미지들이 전혀 없어서 글을 보자마자 여러가지 스케치 아이디어들이 마구마구 솟아났습니다. 주인공도 없고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만 씌어 있어 나머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마음대로 그릴수 있을것 같았습니다.
편집을 맡은 변지현 님이 원고를 페이지별로 나누고 각 장면마다 어떤 그림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간략한 코멘트를 달아서 저에게 의뢰해주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그림책은 펼침면을 기준으로 13-19장의 그림이 들어갑니다.) 한장 한장 읽어보니 각 장면들을 어떻게 그리면 좋을지 금방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도저히 감이 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날 따라 기분도 괜찮고 특히 원고가 저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이번 일은 즐겁게 그릴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고를 여러번 읽어서 머릿속에 집어넣습니다. 아직 종이에 그리지는 않지만 일상을 지내며 계속 이야기를 떠올리고 장면들을 상상합니다. 좋은 생각이 나면 식탁에 앉아 끄적여 보거나 안되면 도로 내려놓고 산책을 하기도 합니다. 13개의 장면들을 버스카드정도의 크기로 낙서처럼 스케치합니다. 어떤 장면은 여러개 그려놓고 어떤게 제일 좋을지 편집자의 의견을 들어봅니다. 저는 제가 그린 모든걸 다 예뻐하는 사람이라서 혼자서는 도저히 골라낼수가 없습니다. 대강의 흐름이 보여지면 한장면 정도 완성을 시켜 놓고 거기에 맞추어 전체 그림의 완성도와 스타일의 기준을 정해 둡니다.
이번 그림책은 지난 책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원래 그리던 스타일을 일부러 피해서 비율과 모양을 잡아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동그란 얼굴을 잘 그리는 편인데 이번엔 길쭉하고 가운데가 찌그러진 듯한 타원의 얼굴과 길다란 팔다리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세계로 정했습니다. 낯설어서 익숙해지는데에 시간이 걸렸지만 그림을 처음 배우는 느낌이 들어 즐거웠습니다. 너무 즐거워서 이 세계에는 중간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크게 과장하거나 축소시켜 아주 쪼그라들어버리거나 들쭉날쭉 계속 색을 바꾸며 산호숲 사이로 헤엄치는 지중해 문어같은 느낌을 내고 싶었습니다. 온 가족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장면을 편집자에게 보냈더니 한참 고민하다 신나는 느낌을 조금만 줄여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아니 신나면 좋은거지 그걸 줄이라니! 하며 발끈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어느 미치광이가 그린 그림같아서 얼른 수정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볼줄 아는 편집자의 역량이 정말 중요합니다.
채색완성샘플을 만들 때엔 주의해야 할게 있습니다. 너무 공을 들여놓으면 다른 장면들도 거기에 어울리는 만큼 똑같이 공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 지쳐 버리거나 나중에 출간일정을 맞추기 어렵게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림그리는 사람들 대다수는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샘플에 혼을 불어넣어 인생역작을 만들어 놓고서는 남은 일정 안에 나머지 장면들 모두 그만큼 완성도를 올리느라 고생합니다. 이 과정에서 냉정하게 균형을 잘 맞추는 작가는 밥먹고 바로 설거지를 하는 사람 만큼이나 아주 무서운 사람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림그리는 사람이 다 잘할수는 없지만 여러 사람들의 중요한 스케쥴이 얽혀있는 일이니 프로라면 반드시 신경써야 하는 부분입니다.
엄마가 회사에서 보스에게 혼나는 장면을 먼저 샘플로 완성시킨 다음, 나머지 장면들에 순서를 매겨 제일 좋아하는 장면부터 완성해 나갔습니다. 잘 떠오르지 않는 장면들은 ‘다른 데 그리다 보면 언젠가 감이 오겠지’ 하며 미룰수 있는 최대한 뒤로 미루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싫은 장면은 끝까지 싫기 때문에 오늘 아니면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싶을 때, 그때도 미루고 조금 더 지나서야 억지로 하게 됩니다. 주로 아프고 슬픈 장면들이 그렇습니다. 행복한 모습들을 그리면 저의 얼굴에서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지만 아픈 그림들은 채워나가면서 저까지 괜히 울적해집니다. 이 책에서는 엄마가 엄마를 그리워하는 장면과 어질러진 집에서 엄마가 우는 장면이 깊이 공감 되어 그리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모든 장면을 완성시키고 나면 스스로가 대견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내 할일은 여기까지다. 또 해냈다.의 느낌이 좋습니다. 얼른 출간해서 여기저기 보여주고 칭찬도 듣고 싶어집니다. 글이 좋았고 편집자가 중간중간 감독을 잘했기때문에 마지막에 수정은 거의 없었습니다. 뒷표지 소컷 정도가 추가되었습니다. 디자이너가 책디자인도 멋지게 해주었습니다.
책이 나오고 나서 어느날 밤, ‘오늘까지 2021 볼로냐Bologna Children's Book Fair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후보접수 마감이니까 밤 12시 전에 접수하고 자도록 해.’라고 아내가 시켰습니다. 네네. 그렇게 접수한 사실도 잊어버리고 그림책 작업을 계속 해야할지 몇달간 일도 하지않고 고민하던 중 수상소식을 들었습니다. 힘든거 알지만 조금은 더 해보자! 라고 말하는 선배들의 다독임처럼 느껴져서 감동받았습니다. 내가 그리는 세계에서 즐거워하고 일정과 현실에 괴로워하며 조금더 해보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고민은 여전히 그림 그리는 옆에 흔들흔들 쭈뼛쭈뼛 불안하게 서있습니다.
2021년 12월, 서울시 동작구립도서관 뉴스레터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