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슬럼버> - 이사카 코타로
읽어 봐야지, 혹은 꼭 읽어 보고 싶다. 이렇게 생각만 하고 지나친 책은 대체 내게 몇 권이나 될까. 아니지, 몇 권이면 다행이지 싶은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다른 책을 읽다 보니 타이밍을 놓쳤다는 이유로, 요즘은 사고 싶은 책을 다 사서 보려니 용돈이 모자란다는 논리로 수도 없이 많은 '보석'들을 시간에 떠내려 보내고 있다. <골든 슬럼버>는 그렇게 떠내려 갔던 것 중 하나다. 언젠가 베스트셀러로 서점가를 장식하고 있을 즈음 읽어 봐야지 생각만 하고 어찌 저찌 잊고 지냈던 책. 읽기 전부터 애틋한 기분이 드는 이유가 단지 중고서점에서 저렴한 가격에 '입양'했기 때문만은 아닐 게다.
더할 나위 없이 멋진 표지지만 첫 장을 넘기기까지 갈등은 있었다. 제대로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영화 <골든 슬럼버>가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큰 재미를 못 봤다는 게 이유였다. 웃긴 건 그 영화도 나는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오래된 선입견이었다. 벼르고 별러온 작품이지만 혹시나 재미없으면 어쩌지, 영화가 그다지 크게 흥행하지 못한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 읽다가 끝끝내 마지막 장을 넘기지 못하는 실패로 트라우마가 남으면 어쩌지.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이야기의 시작까지 갈 것도 없었다. 소설의 목차부터, 소심한 독자는 완벽하게 홀려 버렸다.
이사카 코타로는 상당히 독특한 장치를 설치해 놓았다. 주인공 아오야기의 옛 애인 히구치가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로 첫 페이지를 채우고, 그다음 챕터에는 사건을 관전하지만 주인공과는 (그 시점에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물론 소설을 주인공 하나만으로 이끌어 가기는 어렵기 때문에 주변 인물에 대한 섹션이 등장하는 건 '병가의 상사'겠지만 그래도 이건 멀어도 너무 멀리서부터 시작한다는 느낌이다. 액자식으로 중간중간에 홈이 파여 있더라도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일반적인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 게임으로 말하자면 '테트리스' 같은 느낌이랄까. 뭔가 필요 없어 보이는 블록을 미리 깔아 두고 일(一) 자 블록을 나중에 꽂아 버리는 카타르시스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20년 후의 시점으로 도망가 버리는 세 번째 챕터를 보면 독자로서 확신이 들 것이다. 지독한 정지(整地) 작업을 하는 작가라는. 약간의 스포일러와 풍성한 예고 멘트만 가득한 세 번째 챕터까지만 보고는 도저히 책을 덮을 수가 없게 만드니 말이다.
'알고리즘'이 특이하다고 무조건 재밌는 소설이 될 수는 없다. 스릴러 소설의 미덕은 누가 뭐래도 의외성이다. <골든 슬럼버>의 메인이벤트는 네 번째 챕터부터 시작한다. 그것도 매우 갑작스럽게. 세 번째 챕터까지 작가가 마련해 놓은 미끼를 무느라 약간 루즈한 상태가 되어 있을 독자에게 벼락같은 펀치가 쏟아진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물건'이라고 소개하고 싶은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이처럼 '일본 소설 답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이런 되물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일본 소설스러운 건 뭔가. 특징이 한두 가지만 있을까 싶지마는 가장 불룩하게 튀어나온 한 가지를 꼽는다면 아무래도 '서론이 길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일이든 상당한 개연성을 미리 깔아 두고 벌어지는 케이스가 많다는 것. 이 인물은 이런 성격이기 때문에 이런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저 사람은 저런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저럴 수밖에 없었고, 길든 짧든 어느 정도의 배경이 놓이고 난 자리에 사건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수순이 일본 소설다운 진행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골든 슬럼버> 이 친구는, 그런 게 없다. 대학 때 친구 모리타를 만나고 몇 마디 나눈 부분이 나오긴 하지만 사건이 휘몰아치는 속도는 독자가 주인공에 대한 배경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빠르다. 야오야기가 왜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그런 의문은 일단 접어두는 것이 좋다. 모리타의 눈에 핏발이 섰다는 문구로 그냥 시작이다. 마치 미국 드라마처럼, 시쳇말로 '밑도 끝도 없이' 야오야기는 도망쳐야 한다. 일본 소설로서 이런 시작은 두말할 필요 없는 '백미'라고 본다.
아오야기가 모리타의 차에서 벗어난 이후부터는 필력 싸움이다. 더 이상의 독특한 테크닉은 필요 없는, 플롯과 기풍(棋風)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부분에서 이사카 코타로는 발군의 실력을 자랑한다. 묵직한 한 방 없이 '잔 펀치'를 주로 쓰는 작가일까 싶었던 예상은 가슴팍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작가의 상황 묘사에 무너지고 만다. 도망치는 장면에 대한 서술은 이따금 책장 넘기는 속도가 무서워질 정도로 나를 몰입시켰다. 1인칭 현재형 서술로 채워진 이 부분들은 거리의 리얼한 광경과 과장되지 않은 심리를 적절히 배합하여 독자로 하여금 아오야기로 오버랩되기 어렵지 않도록 '묘약'을 제공한다. 특히 전직 택배 기사라는 주인공의 직업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도시 지형 묘사는 일품이다. 많은 책들이 적확하고 기가 막힌 묘사로 세계를 그리곤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세계의 관찰자로서의 독자였다. 일인칭 시점에서 낯선 세계를, 그렇게 '고속'으로 뛰어다닐 수 있게 만든 작품은 아마 <골든 슬럼버>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훌륭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인 느낌이 있었다면, 안타깝게도 불만스러운 부분은 그 대척점에 서 있다. 아쉽다는 느낌이 드는 수준이 아니라 열악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을 정도다. 일단 인물들의 관계를 맺어 주는 연결 고리가 너무 빈약하다. 대학 시절 친구들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졸업한 지 꽤 오래 지난 시점에서 이들이 등장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사람이라곤 이 친구들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은 기분이라면 충분한 설명이 될까. 주말 드라마에서 얽히고 설키는 치정이 왜 만날 이 사람들끼리만 가능한 건지 분노한 적 있는 독자라면 공감할 수 있으리라.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왜 '출연'하게 됐는지 애써 설득하려 하지만 글쎄, 아오야기의 주변에 있던 인물 중 한 명 정도라면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이토록 중책을 맡은 캐릭터가 셋이나 나온다는 건 쉽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연쇄 살인범이 주인공을 돕는다는 설정은 또 어찌나 빈곤한지. 전혀 현실성이 없었다. 같이 쫓기는 입장이니까 '동병상련'으로 끝까지 아오야기를 돕는다? 도시의 '빅 브라더'를 탄생시킨 장본인이? 본인의 예술적인 범죄를 이어가기도 바쁠 텐데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지, 아무리 찾아보고 이해하려 해봐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냥 어떻게든 아오야기와 연결 고리가 미약하나마 있는 인물로, 연쇄 살인범은 아닌 날쌘돌이 정도로 설정하기는 어려웠을까.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시리얼 킬러'의 심리 상태를 이리도 유순하게 표현한 것에 대해 항의 서한이라도 보내야하나 잠시 고민했었다. 바람처럼 나타난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바람처럼 사라져주지 못한 부분에 대해선 아무래도 인상이 찌푸려진다.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사건 전개도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히구치가 배터리를 구해와 낡은 자동차에 연결하고 아오야기의 메모에 답장을 남기는 장면은 가히 <인터스텔라>급이다. 이런 확률에 목숨을 걸고 도망을 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기억 하나로 가정이 있는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으로 '출동'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느 쪽이든 '나라도 그렇게 했겠다'는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워 보인다. 주인공이 경찰에 붙잡힌 씬도 그렇다. 물론 경찰에게 털끝 하나도 허용하지 않고 끝내 숨어버리는 일반인이라는 설정을 피한 건 잘한 일이지만, 붙잡힌 주인공을 보며 이대로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건 아니겠지 라며 가슴 졸이는 독자들에게 작가는 너무 '못할 짓'을 한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경차와 그곳에서 누군가가 내릴 때의 당혹감이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자세한 내용은...)
이토록 격렬하게 몸서리치는 측면이 있는 건 역시 특이한 케이스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심각한 아이러니다. 심하게 말하면 아마추어 수준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사건 전개와 인물들의 동인(動因), 반면 일본 소설로서는 보기 드문 구성과 호흡을 보이는 탁월함. 호와 불호의 편차가 상당히 큰 작품이지만 엔터테인먼트적 관점에 무게를 두고 본다면 수작임에 틀림없다는 판단이 든다. 이미 그 자체로 작품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지점은 지났다고 봐야 하나. 나는 이 소설에 상당한 애정을 품게 된 게 틀림없다.
아마 이런 이유때문이지 않을까. 일본 경찰은 아무 때나 총을 쏘지 않는다는 상식이 간단히 무너진 황당함, 내가 하지 않은 일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증거로 세상에 떠돌고 있는 아찔함, 평범하게 살아온 인생을 탈탈 털어봐도 총구를 겨눈 세상과 맞설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무기력함, 모두 아오야기만 끌어안고 있는 건 아니다.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나 역시, 혹은 어떤 독자들도 비슷한 느낌을 전해받으며 살아간다. 당연히 그리 흘러갈 줄 알았던 일들이 배신하는 사태, 내 잘못은 아닌데 뭔가 나를 향해 있는 듯한 주변의 시선, 열심히 살아온 것 같지만 부딪힐수록 두려워지는 삶, 아오야기와 나는 서로 다르지만 너무 닮아있다. 도망자 얘기를 즐기고 있는 이가 사실 더 오랫동안 도망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전히 나는 현실에 맞서 싸우고 있다며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자를 제외한다면.
도망쳐, 아오야기, 꼴이 좀 우스워도 괜찮으니까. 좌우간 도망쳐서, 살아
모리타의 외침이 내게 울림을 준다는 게 묘하다. 세상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다면 도망쳐도 괜찮다, 꼴이 좀 우습게 되면 어떠냐, 살아남는 게 우선이지. 포기하려고 하는 순간마다 아오야기를 일으켜 세우는 이 말이 내게도 작은 동력원이 되어 줬다면, 그래서 이 책에 더 많은 애정이 시나브로 싹트게 됐다면 지나치게 독자적인 해석일까. 엔터테인먼트 소설인 주제에 오지랖도 넓지. 어쩌면 도망만 치다 끝날지도 모를 내 인생에도 주인공처럼 완벽한 '페르소나'로 세상에 '빅엿'을 선물할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기대가, 그런 용기가 솔솔 피어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