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면 도망부터 가는 너에게

팻샾에 살던 아이는

by 은수

너는 부르면 도망부터 가지.

우리가 함께 지낸 것도, 네가 부르면 도망부터 가는 것도 그대로 7년째야. 가끔 우리는 말했어. '네가 부르면 달려와서 다정하게 핥아주는 개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야. 아주 인간스러운 말이지? 네가 인간 때문에 겪은 고초를 잘 안다면서도 우린 이런 말이나 했었어.

사춘기그림

아이들은 제주도로 이주하기 전부터 반려 동물과 살고 싶어 했지만, 도시에선 내가 워낙 바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제주도 촌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우린 반려견을 맞이하기로 했다. 처음엔 유기견 센터며 분양센터 할 것 없이 강아지 관련된 곳이라면 어디든 기웃댔는데, 알아둘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완전히 또 다른 세계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번식장에서 태어난 강아지들이 경매장을 거쳐 펫샾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컨베이어 벨트에 줄지어 강아지들이 들어오면 외모와 크기에 따라 가격이 매겨졌다. 가격표가 붙은 펫샾의 좁은 케이지에 진열된 강아지는 팔릴 때까지 밝은 조명과 소음에 노출된 채 지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제때 상품으로 팔리지 않았을 때였다. 반품 처리 돼 다시 번식장으로 간 강아지는 평생 새끼를 낳으며 살거나 식용으로 팔려간다는 것이었다.


전시된 생명

원두는 암컷 단모 치와와로 펫샾 진열장에 있었다. 보통은 생후 3개월 전에 가족을 만나야 하지만 원두는 5개월이 되도록 진열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펫샵 주인이 곧바로 번식장에 반품하지 않은 덕에 우린 원두를 만날 수 있었다. 펫샵 주인도 6개월까지 기다렸다 영 주인을 못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번식장으로 반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우린 사진으로만 원두를 봤고, 지체 없이 입양하기로 했다. 김포에서 제주로 들어오는 지인이 원두를 데리고 와준 덕에 제주에서 원두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트라우마

원두는 강아지의 사회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3-6개월 시기를 좁은 케이지 안에서만 살았다. 더구나 혹시 상품화될 경우에 대비해 극단적으로 적은 양의 사료만 공급받았다.(거의 죽지 않을 정도만 먹인다) 그 결과 원두의 식탐은 지금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력하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더 작고, 더 예쁜 개를 선호하는 인간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품종이 더 작게 개량되면서 말 못 하는 동물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린 이 잔인한 사실을 원두를 통해 하나씩 아프게 알게 됐다.


암전

그해 연말, 우리 가족은 서울에 갔다 다음날 돌아와야 해서 처음으로 원두 혼자 하룻밤을 있어야 했다. 볼 일만 마치고 부리나케 돌아왔지만 하루 사이에 원두의 행동이 이상했다. 손끝만 닿아도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른다든가 잘 걷다가도 벽에 부딪혔다. 아무래도 앞이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당시 우리가 살던 곳에서 제주 시내로 나가려면 한 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그때 제주에는 유례없는 폭설까지 내렸었다. 눈이 며칠 더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기 때문에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원두를 품에 안고 눈길을 달려 제주 시내에 있는 동물병원에 도착했다.


의사 선생님은 시신경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했지만, 제주도에선 확인할 장비조차 없었다. 일단 그와 관련된 약을 먹여보자는 말에 3일 치 약을 받았다.


영구 장애를 갖게 될 것에 대비해 집안 가구 배치를 바꾸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을 듣고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돌아왔는지 모른다. 그날부터 제주도는 폭설로 며칠간 고립됐고, 그사이 원두는 약을 먹은 지 이틀 만에 다시 앞을 보게 됐다.


사과처럼 동그랗고 작은 두상과 짧은 주둥이의 원두는 전형적으로 작게 품종개량된 강아지였다. 원두는 유독 안아주거나 자기 몸을 만지는 것에 예민했다. 얼마 못 가 다리를 절뚝거리고 통증 때문에 목욕조차 시키기 어려워졌다.


원두의 엑스레이 상엔 어디 한 군데 온전한 관절이 없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삶의 질을 위해 결국 2년 전에 고관절 절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의사 선생님은 앞으로 슬개구 수술을 더 받아야 한다면서도 지금 상태로는 얼마 못 가 십자인대가 끊어질 것 같기 때문에 그때 같이 슬개구 수술을 하자고 말할 정도로 원두는 아프다.


여전히 식탐이 많지만 살이 찌면 관절에 무리를 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는 양을 조절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소중한 생명을 그저 하나의 물건처럼 생산하고 처분하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원두가 온몸으로 보여줬고, 우린 원두를 통해 배워가고 있다.

인간이든 비인간 동물이든 살아있는 존재에겐 죽지 않는 한 삶이 이어진다. 원두도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어린 시절의 상처를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우린 이제,

네가 부르면 달려와 다정하게 핥아주는 개이길 바라지 않아.


요즘 너는 앞 발로 밥그릇을 두드려 밥을 달라고 요구하잖아 그런 네 모습이 귀여워서 우린 조금 더 해보라고 하지.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당차게 요구하는 네 모습이 우린 참 좋아. 그래도 가족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잠드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너는 여전히 부르면 도망부터 가지.

부르면 일단 거리부터 두는 너의 행동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어.

'아무렴, 인간한테 당한 게 얼만데 덥석 달려와 안기기부터 하겠어!‘


처음 집에 왔던 아기 원두와 촌에 살 때 성장기 원두 모습






이전 05화알맹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