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가 말했다

세수는 했다고!

by 은수

얼마 전 사춘기의 '의무교육 유예신청 확인서'가 우편으로 도착했다. 만약 내년에 학교로 돌아간다면 다시 2학년을 다녀야 한다. 하지만 내년 4월 검정고시에 합격하게 되면, 다시 한번의 회의를 통해 ‘의무교육 유예 해지 ’ 자격을 얻을 수 있다.(복잡한 과정이지만 시스템에 감사하게 된다.)

요즘 내게는 교실로 오는 어린이, 청소년, 성인수업을 진행하는 일과 학교 밖 청소년인 ‘사춘기'를 돌보는 양육자는 물론 때에 따라 학교가 되거나 또는 선생님의 역할 수행이 모두 포함돼 있다.


홈스쿨의 목표로 자율성을 강조하지만, 방치가 아닌 이상 신경 쓸 일은 많고 많다. 자율성 안에도 규칙은 있어야 했고, 한참 예민한 중2기도 하니 정서적인 부분과 하루 세끼를 챙기는 일등이 모두 포함됐다.


그러다 보니 집 밖을 벗어나지 않는 데도 한가할 틈이 없다. 그 와중에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는 브런치 주 5일 연재를 밀어붙였었다.


그날은 금요일부터 일월화수요일로 이어지는 한 주 연재가 끝난 목요일 아침이었다. 사춘기의 기상과 동시에 우린 대충 겉옷만 꿰어 입고 조조 영화 시간에 맞추기 위해 달렸다. 이른바 우리의 '현장체험 학습'이었다.


겨우 영화관 엘리베이터를 타서야 발견한 사춘기의 모습은 그야말로 산에서 방금 내려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나 역시 겨우 위장용 선글라스를 썼을 뿐이지만, 학교 다닐 때 또래 아이들처럼 앞머리카락 마저 관리하던 사춘기라곤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춘기야, 너 세수는 한 거야?"

말하며 나는 사춘기의 질끈 묶은 머리카락을 풀어 손가락으로 쓱쓱 빗어 매무새를 만져주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춘기가 말했다.


"엄마, 아무렴 어때! 세수를 했든 안 했든, 멋을 부리든 안 부리든 그 안에 있는 알맹이는 그대로 나인걸!"

오!

잠시 생각했다. 나는 누구를 의식해서 아이의 차림을 지적하고 매무새를 고쳐주려 했을까? 지나가는 사람? 아니면 누구? 내게 관심도 없는 타인을 의식하는 버릇이, 마치 때가 되면 배가 고픈 일처럼 익숙해졌군! 씁쓸해질 즈음 사춘기가 말했다.

"그리고, 저 세수는 했어요!"


우리, 현장체험학습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을 보는 내내 우리가 얼마나 쉽게 상황을 왜곡할 수 있고, 타인을 판단할 수 있는지를 느낀 게 아니라 ‘경험’했다. 세 개의 시선으로 나뉜 영화를 따라가는 동안 내 마음은 이랬다 저랬다 수군대며 수없이 타인을 판단했으니까!


현장체험을 마친 뒤 사춘기는 며칠 동안 영화 '괴물'의 장면을 곱씹는 중이다. '지금이 기회다!' 싶은 엄마이자 선생인 나는 더 넓은 확장을 위해 쓱, 다른 카드를 내민다.


빈곤, 소외된 이들, 약자인 아동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고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우리의 현장체험 학습을 이어가 볼 예정이다.

위) 영화 괴물의 엔딩장면/아래) 그림책-남쪽의 초원 순난앵의 엔딩장면

우리 둘 다 영화의 엔딩 장면을 두고 동시에 외친 말이 있었다.

"남쪽의 초원 순난앵!!!"

우리가 함께 읽었던 그림책 '남쪽의 초원 순난앵-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영화 자체 리뷰를 쓰는 것도 의미 있지만, 훌륭한 리뷰를 쓰는 사람은 이미 많고 많잖아! 우린 비슷한 상황의 다른 이야기를 끌어와 더 깊은 이야기를 해 보자!


‘혹시 알아? 더 알이 굵은 알맹이가 되는데 도움이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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