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만약, 죽음과 동시에 양말 한 짝 남김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럴 수 없다면, 지금 가진 물건을 알뜰히 쓰고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 쓰던 물건의 수명이 다하면 잘 보내주고, 새 물건을 들이는 일은 더욱 신중히 하고 싶다. 그저, 작은 바람이 있다면 세탁기와 압력밥솥, 오븐처럼 자주 쓰는 것들이 나와 보조를 맞춰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도시에서 제주로 올 때 대대적인 살림 정리를 했다. 갖고 있는 짐의 1/3쯤 줄여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온 뒤에도 몇 차례 더 짐을 줄였다. 그중 한 번은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때였다. 크게 낙담한 나는, 오히려 2년 동안 이어오던 운동도 멈췄다. 괜히 애만 썼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면서.
병을 얻고 운동까지 멈췄던 그때, 가장 또렷하게 나를 움직인 건 내 몸이 아니라 집 안의 물건들이었다. 내가 사라져도 그대로 남겨질 물건들. 무엇보다 내 목적에 맞게 사용되던 물건들은 남겨진 이들의 큰 짐이 되고 말 것이다.
엄마를 잃은 슬픔보다 먼저, 쌓인 짐과 마주해야 하는 아이들 모습이 그려졌다. 잠깐은 슬프겠지만, 잔뜩 쌓아놓고 떠난 짐을 보고는 울음은 쏙 들어가고, 한숨이 먼저 나올 것이다. 이미 나야 죽은 마당에 신경 쓸 일이 아니겠지만, 이런 상상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기 충분했다. 그때 다시 돌아와 치워 줄 수 없다면 사는 동안 정리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자주 손이 가는 옷을 주로 입고 옷 소비를 하지 않은지 오래됐다. 현재는 미니멀한 옷장의 척도라 할, '갖고 있는 옷이 양팔을 벌려 품 안에 들어올 만큼' 만을 유지하고 있다. 그 외 물건에 대해서도 분류를 명확히 해서 어딨는지 몰라서 못쓰거나 다시 사는 일이 없도록 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다만, 책만큼은 가장 끝까지 갖고 있고 싶어서 아직 정리 목록에 두고 있지 않다. 여러 이유 중에서도 내가 무사히 할머니가 됐을 때를 생각하면, 그때도 지금처럼 집에 책이 있으면 좋겠다.
책을 읽을 때 항상 연필부터 들고 시작하는 탓에 반복해 읽은 책에는 밑줄은 물론 읽을 때의 감상이나 자료를 첨부해 둔 메모가 있기도 하다.
제주도에는 정비가 잘 된 작은 도서관이 많다. 읽고 싶은 책을 모두 사 읽을 수 없기도 해서 책을 자주 빌려 읽었다. 하지만 빌려온 책에 밑줄을 칠 수 없으니, 읽은 뒤 소장하고 싶은 책은 결국 다시 사게 됐다.
마침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일 마저 쉽지 않은 때도 오겠지? 그럼 그동안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고 싶다. 그땐 좀 더 지혜로운 할머니가 돼서 과거의 내가 책에 적어 놓은 메모를 읽으며 '기특한 생각을 했었네!'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죽음을 쥐고 태어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손에 쥔 것을 확실히 인정할지 아니면 불길한 것으로 여겨 애써 외면할 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죽은 이는 무력하다. 무엇 하나 스스로 할 수 없고, 사후의 일은 남은 사람의 몫이 된다.
나는 헤픈 마음의 남은 힘을 모아 내가 쓰던 물건을 제때 정리하고, 남겨질 이의 힘을 덜어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고 나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사는 동안의 나를 좀 더 또렷이 할 거라 믿는다.
이 연재의 여정은 내게 ‘헤픈 마음’을 자신 있게 말해 본 첫 기록이 됐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란 사실도 깨달았다.
헤픈 마음은 타인에게 양보만 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나를 다그치지 않고, 붙잡기보다 한 발 물러나 지켜보는 것이었다. 아끼던 물건을 깨끗이 손봐서 더 필요한 이의 손에 건네는 것, 그리고 언젠가 남겨질 이를 위해 오늘의 집을 잘 정리해 두는 마음이었다.
연재를 하는 동안, 붙잡는 대신 놓아주고, 머무는 대신 흘려보내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더 많이 갖기 위해 애쓰기보다, 덜 남기기 위해 마음을 쓰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가벼워졌다.
은수의 산문-헤픈 마음 1,2의 30편 이야기를 읽어주시고, 마음을 나눠주셨던 분들께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설연휴가 시작됐어요. 언제부턴가 새해가 시작됐다는 설렘보다 또 한 해를 무사히 살아냈다는 마음이 앞서게 됩니다. 이 모든 게 그저 우연한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면, 다시 헤프게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집니다.
새해인사를 전하며,
은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