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헤프게 새를 날려 보낸 뒤 돌아온 집은 유난히 조용했다. 나는 한동안 그 고요를 그대로 두었다. 앞으로 이런 날이 더 많아지겠지?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도 창고가 떠올랐다. 고요를 벗어날 가장 확실한 방법 중에 과연 정리만 한 게 있을까.
나는 몇 해 전부터 생일 즈음이면 창고를 열었다. 일 년 동안 쓰지 않았거나 깊숙이 밀어 넣어 둔 물건을 전부 꺼내 바닥에 펼쳐 놓는다.
마치, 집 어딘가에 커다란 우물이 숨어 있던 것 같다. 끌어올릴수록 올라온 것은 물건이 아니라, 미뤄둔 시간과 주저앉은 마음이었다. 나는 떠나보낼 것과 남겨둘 것의 편을 가른다.
비우는 일은 자신과의 대화였다. 아니, 대화라기보다 격렬한 토론에 가까웠다. 비싼 돈을 주고 샀다는 이유로 고이 모셔뒀던 물건을 꺼내면, 내 이상과 현실 사이엔 여지없이 경계가 그어졌다. 언젠가 쓸 거라 믿으며 키워온 환상에 비해, 막상 손에 든 물건은 초라했다.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얼룩이며 빠진 부품은 어디로 갔나.
나는 토론 전반에서 변론할 말을 변변히 찾지 못하는 쪽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머뭇거리게 되는 순간은 따로 있었다. 버리긴 아깝고, 갖고 있자니 더는 쓰지 않을 물건을 마주했을 때였다. 그때부터 물건에는 사연이 붙기 시작한다. 그 시절의 나, 그때의 마음, 그 물건을 선택하기까지의 구차한 변명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나는 버릴 수밖에 없는 물건엔 조용히 선고를 내렸고, 누군가 필요할 법한 물건은 중고마켓에 나눔 하거나 저렴히 팔았다.
중고마켓에 올릴 물건이 정해지면 나는 먼지를 털고 얼룩을 닦았다. 떨어진 단추를 달고, 구겨진 옷은 다림질했다. 그런 뒤, 최대한 단정하게 포장했다.
처음엔 이런 나의 행동이 그저 받는 이가 기분 좋길 바라는 헤픈 마음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살림의 절반을 비울 때쯤 그것은 배려보단 애도에 더 가까운 마음이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이내 몹시 씁쓸해졌다.
나는 왜 내 것일 때 더 소중히 가꾸며 살지 못하고, 떠나보낼 때에야 보류된 시간을 메우느라 비지땀을 흘리는가!
나는, 물건들을 내 것이었을 때보다 더 정성스레 닦고, 더 단정히 싸맨다. 헤픈 마음은 무엇이든 떠나보낼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났다. 나와 함께 했던 물건 하나에도 끝까지 예의를 다하는 태도, 그것이 내가 지키고 싶은 헤픔의 다른 얼굴이었다.
창고에서 꺼내진 물건들 사이에는 일관된 취향도, 자랑할 만한 취미의 역사도 없었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이 일에서 저 일로 바삐 옮겨 다니던 시간의 발자국뿐이다. 나는 유적지를 따라 걷는 사람처럼 조심히 그 흔적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서툴렀는지, 그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는지,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말했다. 이젠 내가 제자리로 돌려놓을 테니, 거기 앉아서 좀 쉬라고 말이다.
정리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먼저 가벼워졌다. 나는 과거를 부정하지도, 미래를 미리 당겨 살지도 않은 채, 오늘에 당도했다. 모두 떠나보낸 것들 덕분이었다.
삶은 성공과 실패 같은 이분법적 정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애당초 그걸 저울질할 기준도 없었다. 종종 우리를 흔드는 그 기준이라 할 것도 결국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삶에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때때로 우릴 불안으로 밀어 넣지만, 삶의 과정을 풀 열쇠가 우리 각자의 손에 쥐어졌단 사실을 생각하면 기뻤다.
무엇도 완전히 나쁜 건 없었다. 설사, 그랬더라도 숱한 경험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날들이었다. 아직 시작도 못한 이야기를 통과하려다 긴 출렁다리를 순식간에 건넌 느낌이다. 나는 과연 몇 번이나 '오늘'을 살아봤을까?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지금의 내가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오늘'에 당도했는걸.
다시 보관할 물건을 모두 닦고 세탁해 다림질한다. 이불을 빨아 강렬한 태양 아래 두고, 부서질 듯 바삭하게 말려놓았다.
기울어진 캣타워의 나사를 조이고 고양이 털을 천천히 빗긴다. 떨어진 단추를 달고, 식사 빵을 구워 놓고 책을 읽다 잠시 낮잠에 드는 일상. 오늘을 살고, 내일도 똑같은 일을 하는, 나는 바로 ‘지금’에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