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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세준 Feb 10. 2023

외모란 무엇인가

외모란 무엇인가?

일단 내 몸(my body)이 있다.


그것은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있고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며 먹고자고싸고 아무튼 살아있다.


그렇게 살아있는 내 몸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I)과 남의 관점(You)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남은 일단 나를 제외한 모든 타자라고 치자.


그러면 다음의 두 가지 관점이 생겨난다.   


- 내가 바라보는 내 외모 my body * I = 내눈 외모관(觀)

- 남이 바라보는 내 외모 my body * You = 니눈 외모관(觀)


인간은 아주 어려서부터 본능적으로 대상의 얼굴을 찾고 식별하고 지각하고 읽고 반응한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얼굴에 민감하다.


갓난아기 때부터 벌써 양육자의 얼굴을 보고 그 표정을 기가막히게 따라한다.


아기는 얼굴 중독자다.


어떻게든 눈을 맞추고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상대의 표정을 읽으려 애쓴다.  


부모가 웃으면 함께 웃고, 울면 함께 울며 예쁘다고 바라보면 예쁜 표정을 짓고 밉다고 바라보면 표정이 일그러지고 차갑게 바라보면 얼굴 근육도 따라 굳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의 외모관은 영유아기 때부터 결국 니눈 외모관, 즉 남이 바라보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타자인 주 양육자가 바라보는 눈빛, 표정에 의해 주조된다.  


처음부터 우리는 내 외모를 내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내눈 외모관이 먼저가 아니다.


니눈 외모관이 먼저다.  


나의 외모는 주양육자의 시선 - 니눈에 의해 일차적으로 규정된다.


다행히, 우리는 나와 닮은 존재를 본능적으로 더 선호하고 매력을 느끼고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고, 그 본능은 생물학적 자손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보통은 부모들이 아이를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예쁘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아이는 그 눈빛과 표정을 그대로 흉내내며 주 양육자의 니눈 외모관을 내눈 외모관으로 자연스럽게 변환시킨다.


내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자기 품으로 끌어 당기고 안아주고 뽀뽀해주고 볼을 비비고 그렇게 애정을 표현한 주양육자와의 기억이 아이가 자신의 외모에 대해 갖는 '주된 지각 primary perception'을 형성한다.


여기서 말하는 '주된 지각'은 거울을 바라보면서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객관적으로' 나의 잘생김, 예쁨을 감탄하는 그런 판단이 아니라 거울을 바라보면서 즉각적으로 드는 어떤 느낌, 편안하고 괜찮다는 안도감에 가깝다.


그렇게 발아한 건강한 자기애는 성장기 내내, 특히 아이가 점점 더 큰 사이즈의 사회 집단으로 들어가고 그 속에서 타자와의 보다 빈번하고 보다 난이도 높은 상호작용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다.


그리고 여기에, 바로 이 '주된 지각'의 자리에 언어적 해석이 덧씌워지면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내눈 외모관'이다.


발달 순서는 니눈 외모관 -> 내눈 외모관이다.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랑받을 만한 존재야'라는 자각의 탄생이다.


이것이 없거나, 희박한 사람들 있다.


일단 주된 양육자로부터 애정어린 시선을 받지 못하고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읽어내지 못한 불행한 영유아시절을 보냈을 가능성이 99.999999999%에 수렴한다.


그렇게 부재한 애정의 시선과 사랑어린 표정을 찾으려 나와 남의 외모에 집착하지만 그 갈애는 아무리 거울을 들여다봐도,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내눈 외모관이 탄탄하게, 건강하게 자리잡은 사람들은 외모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의 타인의 시선을 내 외모를 비추는 거울로 쓰지 않고,

내 안의 사랑받은 기억들을 거울로 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거울을 보며 불안해하지 않고,

거울을 보며 자신의 단점을 강박적으로 찾지 않는다.


내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도 '안심'이다.


그는 외모를 가꿀 수도 있고 가꾸지 않을 수도 있으며 성형수술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으며 보톡스를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으며 점을 뺄 수도 있고 안 뺄 수도 있다.


내눈으로 내 외모를 주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뭘 해도 된다.


심지어 콧털을 길러도 되고 잘라도 된다...(라고 쓰면 아내에게 혼나겠지?)


아무튼 이런 유사-대상관계풍의 단상을 남긴 것은,


일단 '남'의 외모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불쌍한 한국인들이 너무도 많아서 안타까운 마음, 대자대비심(?)이 갑자기 발동된 것도 있고


외모에 대한 집착의 근원이 결국은 내가 아닌 타자의 시선에 규정되면서 생긴 결핍임을 강조하면서,


부디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을 설령 내가 그들의 부모가 아닐지라도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대해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게 잘 안된다면.... 돈 좀 써서 심리상담 받는 걸 추천한다.


돈 없으면 근로자복지지원사이트나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도 상담받을 수 있다.


관련 책으로는 앨리스 밀러의 모든 책들을 추천한다.


앨리스 밀러는 거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영유아기에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함에서 찾는 대표적인 환원론자이며

 

중요한 타자, 즉 주양육자나 그에 준한 타인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크게' 잘못되거나 맛이 가거나 정신줄을 놓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나는 그녀의 관점에 근본적으로 깊이 동의하며 그러한 관점에서 벗어난 사례를 아직까진 찾지 못했다.


밤이 늦었다. 아, 새벽이네.


야근하다가 집에 가기 전에 글을 썼는데 길어졌다.


내일은 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이다.


나는 가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 적은 있지만 그래도 아이를 바라보면서 단 한 번도 사랑의 시선을 거둔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부모에게 받은 것이었고 앞으로도 물려줄 것이다.


외모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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