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숙명: 미니멀리스트
어느덧 발리에서의 30일이 훌쩍 지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이번에는 30분만에 짐을 싸겠다고 별렀으나 2시간이 걸렸다. 그것도 많이 준 거다. 작년에 발리에서 3개월 있었을 때는 제법 살림이 불어나 짐싸고 정리하는데 반나절이 소요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버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러니 이것을 가져갈까. 버릴까. 고민하고 결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기어코 다 먹지 못했던 망고잼마저 가방에 넣었다. 빨리 짐을 싸야할 때는 고민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 일단 다 넣는 셈이었다. 그렇게 10kg 이하로 가져왔던 가방은 체크인할 때 확인하니 12kg가 되어있었다. 2kg는 소모품이라 싱가폴에서 먹고 버리면 다시 10키로가 되겠거니 했지만 그래도 쉽게 12kg이 된 것에 놀랐다. 다행히 싱가폴에서 지내는 10일동안 쭉 재워주기로 한 친구와 동행을 하고 있어서, 짐을 멘 채로 집을 옮겨다니거나 어딘가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었기에 12kg가 부담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싱가폴에 도착한 건, 새벽 1시반이었다. 혼자였다면 창이 공항 어딘가에서 잠을 떼울 시각이었다. 공항노숙을 많이 해보았지만 창이공항이 여지껏 최고였다. 창이공항에서 노숙하게 되는 날이 되면 설렐 정도다! 그런 창이공항에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갑작스런 이별통보라니.
내가 양보해서 바로 직전에 체크인을 했던 친구의 가방은 뒤늦게야 나왔는데, 그 뒤를 따라 들어갔을 내 가방은 새벽 2시반이 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주인이 보이지 않는 가방 3-4개 정도만이 컨베이어벤트 위에 얹혀 여러번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설마, 설마, 설마!’라고 머리속에서 쿵쿵쿵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공항 직원의 안내를 받고 수하물 분실 신고를 하러 담당 사무실에 들어갔다.
친절한 미소를 짓는 직원은 아마도 수하물은 아직 발리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 했다. 이따금 그런 일이 있다고 했다. “거기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있는건지 종종 이런 경우들이 있었어요…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보통 하루만에 발견하고 되찾으니까 걱정말아요.” 그녀의 말이 믿음직스러웠다할까, 믿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곧 여유를 찾았다. 분실신고서에 친구의 연락처를 비롯해서 가방에 대한 정보를 기입했다. 신고를 완료하고 나온 나에게 친구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런.. 정말 유감이야. 그러나 분명 창이공항에서 분실 된 것이 아니라, 발리 공항의 책임이었을 거라고 확신해.” 나는 기내에 들고간 작은 가방만을 메고 친구와 함께 친구집으로 향했다. 새벽 3시반쯤 도착하자마자 씻고 잠이 든 우리는 피곤했던지라 긴 잠을 잤다.
다음날 점심 쯤 일어나서 거실로 나가자 조금 먼저 일어나있었던 친구는 위로의 말부터 전했다. “아이구 이런. 아직도 연락이 안왔어. 그리고 내 호주 친구가 그러는데 Jetstar 완전 구리대...” 저가 항공들은 믿을 게 못되니 연락을 기다리기 보단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해보는게 낫겠다며 야무진 그 친구는 분실신고서에 적혀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친구는 또 다시 나를 위로했다. 오늘 저녁에 다시 전화해보자 했다. “그래 그래. 괜찮아~ 고마워!” 그녀는 약간은 의아해했다.
너 그런데 가방 분실한 사람 치곤 되게 기분 좋아보인다?
신기하게도 사실 정말 그러했다. 그 날 나는 매우 기분이 상쾌했다.
물론 처음 밤중에 공항에서 수하물을 분실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어야 했을 때는 물론 멘붕을 겪었다.
비어가는 컨베이어벨트를 보며.
‘설마, 설마…에이.. 설마…’
시간이 한시간이 지나고,
‘헐…! (실제로는 데ㅐ으##ㅕㅑㅅㅑㅏㅇ라ㅡㅇ라ㅂㅜ아ㅜㄴ레ㅐ다아ㅢㄹㄴㅇ*(#&*(^@)’

그러나 ‘설마?’라고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한켠에는 이런 사태가 언젠가 오리라고 예상하기도 했었다. 여행자들과 각자가 겪어온 별의별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끝이 없는데, 그 중에는 분실/도난 경험들은 우리를 가장 멘붕에 빠뜨리면서도, 거의 보편적으로 겪는 일이었다. 가까운 친구에게도 거의 모든 것을 도난 당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바로 이틀 전이었다. 그 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언젠가는 나도 겪으리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항상 그게 당장이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다행히 멘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여행이 사람의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회복탄력성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창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여행과 창업 모두 안정된 길에서 벗어나서 리스크를 감수하고 자신만의 길을 일궈가는 점이라는 같은데, 그 길을 창조해가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들은 분명 생기고,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 또한 중요한 그 길의 연장인 것이다.
여전히 나는 멘붕이 잘 오는 타입이긴 하다. 발리에 있으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는 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위탁수하물이 분실되었을 때에 나는 좌절해 있기 보다는, '무엇을 해야할까.'를 더 생각하기로 했다.
Plan A - 찾기 위한 노력을 한다. 젯스타와 창이공항을 귀찮게 한다
Plan B- 못 찾을 경우 야시장, 중고장터, 친구들한테 안 필요한 물건들 구걸하기 등을 이용해 최소한의 경비로 최소한의 짐을 다시 꾸린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이와 같은 일이 앞으로 안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수칙을 세우고 빠르게 행동에 옮긴다.
이렇게 계획을 어느정도 세워두고 전화를 기다리기로 했다.
분실신고할 때 작성하는 서류에는 가방의 외형적 특징을 비롯해서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기입해야 했는데, 그 12kg의 정체가 막상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그건 대부분의 그것들이 별로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내 손에 있고, 가질 수 있을 때는 버리기 힘들더니, 이렇게 타의로 없어지니 그것들이 없어도 나는 잘 살 수 있음을 산뜻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조금 더 머리에 에너지를 보내서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기억은 해내긴 했다. 다행인 것이 기내에 메고 다니는 가방에 가장 중요한 노트북, 외장하드, 카메라 등이 다 들어있었고, 위탁한 가방에는 주로 옷, 수건, 화장품, 세면도구들, 운동화 등이 차지 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망고잼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속이 쓰라린 것은 컨퍼런스에서 받은 수많은 명함들이었다. 왜 직후에 스캔해두지 않았는지 후회하긴 했다. 옷들은 대부분 중고로 산 것이거나, 친구들이 준 옷들이 세벌 있었다. 중에는 내가 아끼는 옷도 한두벌 있었다. 노마드로 살면 옷을 많이 들고 다니지 못하다보니 똑같은 옷을 아주 자주 입게 되는데, 특히 자주 입었던 아끼던 옷들은 그만큼 뽕을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너희들을 놔줄 때가 되었었나 보구나. 없는 옷들을 생각하며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찾아왔던 멘붕은 곧 해방감으로 변했다. 자유다!!!
항공사마다 다르지만, 위탁수하물에 대해서 대략 15,000원 - 25,000원을 추가로 내야하는데, 매번 결재할 때마다 부담이기도 하지만 모이면 더 크다. 연초에 두달 동안에만 나는 홍콩->방콕, 방콕->발리, 발리->싱가포르, 싱가포르->방콕 사이를 이동했다. 홍콩-방콕 구간은 저가항공인데도 위탁수하물비용이 공짜였던 것을 빼고 나머지 3번의 이동하는데에 든 수하물 위탁비는 대략 15,000원 * 3회 = 45,000원으로 그 돈으로 잘하면 다른 나라로도 비행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기내 수하물의 최고 허용 무게치인 7kg의 가방으로만 여행을 다니고 싶다라는 생각이 해왔다. 그러면 돈도 아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처럼 위탁수하물을 분실할 일이 없어진다. 그 뿐만이겠는가.
1. 적은 물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생활도 단순해져서 중요한 것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2. 짐이 적어지므로 무릎 및 몸에 큰 부담이 없어진다. 그건 한번씩 큰 이동을 한 후에 몸이 회복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이 줄어듬을 의미하고 그만큼 새로운 장소에서도 일상을 빠르게 이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7kg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안다. 내 맥북에어만 해도 커버와 배터리 등을 합해 2kg가까이 되니까. 그래도 적어도 여름의 장소에서만큼은 7kg로 다닐 수 있는 가벼운 여행자가 되기로 일단 목표를 세웠다. 충격요법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은 것들은 소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니, 올 해 안에는 그렇게 체질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체질의 문제는 아니지만, 덜 소유하고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것, 그렇게 여행하는 것은 그만큼 근본적인 변화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아닌게 아니라, 이렇게 가방이 없어진 동안 내가 소유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 내 생각이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한국에 동생집과 고향 집에는 늘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언젠가 필요할 그날, 언젠가 읽게 될 때를 위해서, 그리고 취향이라는 이름 하에 버리지 못했던 물건들이 각각 산더미처럼 있다. 이성적으로는 정리필요를 알았지만, 마음이 놓아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물건들에 대한 집착과 불안이 사르르르 녹는 것을 느꼈다. 필요 이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납득하게 되었다. 작은 가방 하나만 메고 친구집으로 향할 때 들었던 ’가벼워서 좋다.’라는 쾌감을, 한국에 들어가면 방을 제대로 정리해서 느껴보고 싶었다.
어쩌면 여행하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숙명적인 결론인 것 같다. 길 위에선 많이 소유할 수가 없다. 많이 가지고 다니려다가도 나중에 항복하고 만다. 나처럼. 허나, 미니멀리즘은 모든 소유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블로그 The minimalists를 운영하는 Joshua와 Ryan은 이렇게 아름답게 정의했다.
Minimalism is a tool to rid yourself of life’s excess
in favor of focusing on what’s important
—so you can find happiness, fulfillment, and freedom.
미니멀리즘은 당신이 행복, 충만, 자유를 찾기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삶에서 과다한 부분들을 제거하는 툴입니다.
끄덕끄덕.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당장 컴퓨터의 묵은 파일들부터 정리하자고 결심하고 행동에 옮긴지 얼마안 되었을 때 딩동!하고 벨이 울렸다. 친구가 기쁘게 소리쳤다. "예지!!! 네 가방이야!!"
내 가방이 미아가 된 이유에는 짐에 붙은 태그가 문제였다. 발리에 갈 때도 같은 항공사인 Jetstar를 탔었는데 그 때의 수하물 태그가 안떼어진 상태였다. 나를 수속해준 무심한 직원도 그 태그를 그대로 두었는데, 그게 혼선을 준 모양이었다. 바로 보자마자 태그들을 다 떼어내버렸다. 많이 헤맸는지 더러워진 가방을 보며 반가움과 함께 약간은 실망이 들었다. 자동적으로 시작될뻔 한 미니멀리스트의 삶의 시작은 연기되었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10일 후 싱가폴을 떠날 때는 단 30분만에 짐을 쌌다. 덜렁대는 내 자신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놓고 가는 게 없을까?”하고 짐을 완전히 싸지 못했던 나였지만, 이제는 더이상 없어져도 치명적일 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이젠 질문을 바꿔 이렇게 생각한다. 올해안에는 7kg가방의 미니멀리스트 여행자가 되어있을 자신을 기대하며.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