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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Sep 14. 2023

결혼 10년 차 아줌마를 설레게 한 고백

 "그때 나는...

당신 손을 잡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알았지. 그런데 나만 행복하게 살까 봐. 내가 행복해도 될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 때문에 당신은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게 될까 봐.


당신이 흔들림 없이 날 선택했을 때...

 이제껏 부모님과 선생님이 내준 선택지 안에서만 선택하며 살던 당신이 결혼만은 당신이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당신 선택이 최고가 되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어.


당신은 선물이야.

내가 정말 힘든 상황에서..

시리고 아리게만 살아온 삶에서

열심히 살았다고 하늘이 준 선물.


내가 열심히 살았다고.. 이런 선물 같은 사람이 오는구나. 감히 받아도 될까.. 늘 이런 마음 때문에 너무 조심스러웠어."


나는 소란 속에서 낮게 깔리는 그의 고백을 들으며 소맥을 들이켰다. 눈물도 조금 삼켰다. 이제는 기억도 안나는 반짝였던 예전부터 지금까지의 나를 선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그 앞에서 홍게무침을 뒤적거렸다. 맥주잔에 소주를 타고 젓가락으로 탁! 휘저었다. 소맥을 말아 건네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예전 어리고 귀여웠던 소년은 주름진 중년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는듯한 눈시울로 울음을 삼키며.





그는 27살에 30살인 나를 만났다. 3년을 만나면서 몇 번 헤어지고 다시 만났는데 내가 33살이 되면서 결심을 했다.

결혼하기로.


 "처음엔 호기심에 너랑 만났어."

"알아."

"당신은 일 년의 대부분을 바다에 나가야 하는 항해사고, 모은 돈도 없고... 안정적인 걸 좋아하는 내가 결혼하기 좋은 상대도 아니고... 아직 너 결혼 생각 없는 것도 알아. 그런데 나는 결혼을 해야겠어. 아빠가 내년에 정년퇴직하시는데 첫째인 내가 먼저 결혼하기 바라셔. 내가 사귀는 사람이 없으면 동생부터 결혼하게 하겠지만 당신이랑 3년을 만났으니 이제 결정해야 할 것 같아.

떠밀려서 결혼하자고 하는 건 아니야.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은데 먼저 말하지 않으니까 내가 먼저 말하는 거야."


그는 미적지근했다.

환호하지 않았다.

심란해 보였다.


불안감을 느낀 나는 그 마음을 감추기 위해, 상처받지 않았음을 부러 내세우고 싶어서 "상관없어. 결혼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나는 결혼할 거고, 누구랑 결혼하든 잘 살 자신 있어. 난 준비되었거든."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래, 하자."

라고 말했다.


억지로 우겨서 대답받은, 정말 거지 같은 프러포즈.

내가 기다리다 지쳐 먼저 결혼하자고 말을 했는데...

겨우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실망감을 떨치며 '안 하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억지로 대답한 거 같은데'라고 투정 부리자 그는 진중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아니야, 내가 먼저 결혼하자고 말했어야 했는데 당신이 먼저 말하게 해서 미안해. 그래서 그래.'



그는 우리 집에 오기로 한 날,

몸이 좋지 않다며 못 가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전하자 부지런히 마당을 쓸고 계시던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엄마도 손님 맞을 식 준비를 하던 손을 탁 놓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내가 남자친구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도 처음, 결혼하겠다고 말한 것도 처음, 그는 이래저래 나의 진중한 사귐의 첫 타자였는데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의 무게는 그 정도가 아니었나 보다.

 부모님 앞에 나는 부끄러운 얼굴과 어디 둘 곳 없는 몸을 내비치기 싫어 자전거를 타고 동네 산 비탈길을 달렸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내리막길, 가속도가 붙은 자전거를 겁 없이 내몰았다. 지금의 세계를 끝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패달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밟았다.

 마음속에,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빠른 속도에 무서움이 일었다. 적절한 판단도 없이 손이 브레이크를 잡았다. 자전거는 속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뒷바퀴가 앞바퀴를 앞질러 하늘로 날아올랐고, 동시에 나도 날았다. 옷이 찢긴 채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응급실에 누워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다쳤다는 걸 알면 그가 오지 않을까, 내가 자기 때문에 다쳤다는 걸 알면 당장 오지 않을까.'


나는 황급히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많이 다쳤다고. 그는 괜찮냐고 물을 뿐 오지 않았다. 리고 며칠 지나 몸이 다 나았다며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가면서도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끝내는 것이 이리 어려웠던 가, 우리 사이에 부모님께 인사하러 오기로 한 일을 함구하고 나는 그에게 계속 연락을 했다. 친구들이 자존심도 없냐며 기함했다. 결혼 승낙을 선선히 하셨던 아버지는 이제 그런 사람에게 나를 못 주겠다며 반대하셨다. 왜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못 헤어지냐고 동생들이 속상해했다.

남자가 여자 집에 인사오기로 했으면 두 다리 멀쩡하면 오는 법인데 감기 때문에 못 오고, 연인이 다쳤다는 데도 안 오면 그건 딱 그만큼의 마음인 거라고.


앞으로 우린 어떻게 하지라고 말하는 나에게 그는 답했다.

"엄마가 결혼하지 말라고... 반대하셔."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이제 그만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결국 원가족을 선택하는 하고 마는 그에게서 깊은 실망을 느꼈다. 모멸감을 느끼며 '그래, 너는 그렇게 원가족 레에 갇혀 열심히 그들을 부양하며 살아라, 끝까지 네 삶을 저당잡혀 살아라', 며 저주했다.  



헤어졌다.

헤어진 1년 동안 나는 결혼할 사람을 열심히 찾으러 다녔다.  일주일 내내 소개팅을 했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드물게 그가 전화를 했다. 잊는데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며 가끔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되었을 때 참지 않게 하는 것도 이별의 한 방법이라 생각해 받아주었다. 나도 그런 시간이 간절히 필요했으므로.


그가 그런 행동을 했음에도 그를 끊어내지 않는다고 나를 아끼는 친구들은 화를 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며. 물론 내가 배운 사랑도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여러 해 동안 만나며 느낀 것이 있었다. 항해할 때 아침저녁으로 보낸 편지 속에 쌓인 감정들의 누적이 있었다. 그 누적 때문에 그를 자꾸만 뒤돌아봤다.

그를 향한 변명의 말들은 상투적이고 기괴해서 누구의 공감도 받지 못했지만 그 시절 나는 내가 사랑한 그를 향해 끝까지 변호해주고 싶었다.


그가 그렇게 한 행동에는 평범한 단어들로, 아니 현명한 단어들로 조합하더라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있었다.


1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그만한 사랑에 빠지지 못했고  그 역시 여전히 나를 못 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락을 하지 않아도, 만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긴 항해에서 하선한 그는  곧장 우리 집 앞으로 와 기다렸다. 가로등 아래 덥수룩한 머리로 다소 야윈 얼굴로 긴 항해를 끝내고.  항해를 끝낸 사람만이 가지는 고독한 냄새를 끌어안고 내 앞에 서서 웃었다. 고요한 웃음이었다.


이제 물러서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결혼을 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내가 자존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세상에 정답처럼 사람들이 내놓은 사랑은 이런 것이다라는 정의를 외면해서도 아니다. 그저 나의 직감이 '이 사람이다, 나의 선택에 실패가 있을지언정 이 사람이어야 한다, 지금은 오직 이 사람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동안 살며 쌓아온 정보와 감정의 누적이 그렇게 말했다.


 지금, 나는 이 사람이어야 한다고. 어쩔 수 없이.


너무너무 좋아했다. 그게 특별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그가 지나치게 평범해서 익숙한 존재라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그게 사랑인지도 모르고.


결혼을 하고서 나는 종종 그에게 장난을 건다.

"자기 예전에 내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 이랬잖아. 우리 엄마가 결혼하지 말래~, 진짜 못나 보였어.'

종종 우리의 역사를 아는 친구들과 만날 때도 그 일은 그의 흑역사로 화두에 올리고 했다. 순전히 그를 놀릴 목적으로.

"야, 세상에. 남자가 여자 집에 인사오기로 한 당일에 못 오겠다고 하는 게 어딨냐? 얘 다쳤다는 데 오지도 않고."


그런 놀림 앞에 그는 지난 10년 간 사람 좋은 웃음으로' 그게 아니에요, 정말 아팠다니까요, 저도 마음이 아팠죠 '라고 말하며 넘어간다. 그저 그런 그의 말에 알지 못할 알싸함이 퍼지고 10년이 지났지만 그때의 그가 밉다고 느꼈다. 그는 이렇다 할 변명을 제대로 못하고 넘어간다.   그는 그때를 적확히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했고 나는 그때의 상처를 적절하게 위로받지 못했다.



10년이 지나

시댁에 아이들을 맡기고 단 둘이 보름달 해변을 걷다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 그때의 상처를 끝냈다.

어떤 사람은 지난날 왜 자신이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설명할 언어를 찾는데 오래 걸리기도 한다. 섣부른 변명 대신 적확한  설명을 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스스로를 이해하고 판단할 만큼 소요되기도 한다. 그가 그러했다.


얼굴도 불콰하고 눈시울은 더 빨간 두 남녀가 시끄러운 포장마차를 나와 손을 잡고 해변을 걸어 아이들과 부모님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그 사이 보름달은 더 높이 하늘로 떠올랐고, 잔잔한 검은 바다는 그 달을 포용해 또 다른 색의 달빛으로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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