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공유서재에 가다

<즐:독, 독서의 즐거움> 안동시립박물관 별관전시실

by 근데 이제

책이 있는 곳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지난여름 무더위에 지쳐갈 즈음, 하루 휴가를 내고 공유서재를 찾아가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종일 빈둥거렸다. 행복했다. 정말이지 먹고사니즘만 아니라면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책만 보며 살고 싶다.


그즈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전시가 있었다. <즐:독, 독서의 즐거움> 안동시립박물관 특별전시다. ‘안동’ 하면 하회마을이나 하회탈춤 같은 것이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론 ‘뼈대 있는 가문의 전통’ 같은 것이 떠오른다. 안동시립박물관이 기획한 전시에 가면 종종 ‘뼈대 있는 가문’의 고귀한 무언가를 볼 수 있다. 이번엔 ‘독서’다.


전시가 열린 별관전시실은 작은 공간이지만 나름 짜임새 있고 알차게 구성되어 있었다.

독서 지락 讀書之樂,

독서지행 讀書之行,

독서지소 讀書之所,

독서지인 讀書之人.

‘즐거움, 행위, 공간, 사람’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안동 선비들의 독서 생활을 보여줄 요량인가 보다.

전시실에 들어서자 짙은 밤색 나무의 색감과 질감을 그대로 살린 전시패널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 낯선 스타일인데 왠지 정겨운 느낌이 든다. 20세기 교실의 투박한 나무책걸상이 떠올랐다. 종이가 되기 전의 나무가 활자를 만나 전시실 전체가 하나의 큰 책이 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나는 거대한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선비들의 독서생활을 엿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선비에게 책은 아마도 재산목록 1호가 아니었을까. 종이가 귀했고, 글로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명예롭고 즐겁던 시대. 선비들은 책을 애지중지 보살피고, 수고로이 베껴 만들었다. 선비에게 책과 독서는 곧 삶의 기쁨이자 가치였다. 물질이 곧 명예요 즐거움인 시대를 사는 나로서는 조선의 선비들이 근사해 보이지만, 어쩌면 그들은 책이 차고 넘치는 이 시대를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사가독서는 1426년(세종 8)에 젊은 관료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훌륭한 인재 양성을 위해 시행한 제도입니다. (중략) 성종 때에는 도성 밖의 한가한 곳에 국가 상설기구를 설치해 선비들이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독서당’입니다.”_전시 내용 중

믿기지 않는다. 국가가 독서 휴가를 제도화하고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상설기구까지 설치했다고? 조선시대 혹은 유교 사회라고 하면 개인적으로 ‘권위주의’와 ‘허례허식’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데 이런 낭만적인 제도가 있었다니. 그동안 선조들을 은근히 비난하고 있었던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좋은 제도는 지금도 국가적으로 시행되어야 마땅하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명나라 서예가인 진계유의 눈에 비친 조선 사람들의 책사랑이 유별났나 보다. 이토록 책을 좋아하던 민족이 지금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최근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6명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고 한다(2023년, 문체부). 책 대신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너무 많아진 탓일까. 역시나 풍족해서 탈이다.

전시실에는 안동 선비들의 독서공간이 있는 풍경 사진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그 풍경은 한쪽 벽면 가득히 영상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새소리, 물소리, 은은한 우리 가락 소리와 함께. 이런 곳에서 글을 읽으면 절로 신선이 될 것만 같은 풍경들이다. 사실 내가 이 전시를 보러 한달음에 달려온 이유가 여기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벗 삼아 숲 속 한편에 고요히 자리한 고산정(孤山亭),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소나무 둥치가 멋스럽게 어우러진 만휴정(晩休亭)을 비롯해 선비들의 독서공간으로 활용되었던 서당과 서원, 산사가 아직 안동 곳곳에 남아 있다. 검색해 보니 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옥연정사(玉淵精舍)는 독서 프로그램이 있는 고택체험 숙소로 운영 중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경험해 보고 싶다. 일명 조선 선비 독서 체험!


전시의 마지막 코너에선 조선시대 독서인으로 유명한 세 분을 만났다. 책으로 문치를 이루고자 책가도(冊架圖)를 그리게 한 정조대왕과 ‘책만 보는 바보’라 불린 실학자 이덕무, 그리고 시인 김득신. 김득신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 역시 경상도관찰사를 지낼 정도로 잘난 인물인데, 김득신은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은 후유증 때문인지 10살이 되어서야 겨우 글을 깨우쳤다고 한다.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 내게 귓속말을 하는 것 같다.

‘나 같은 사람도 결국엔 이루었으니 당신도 포기하지 마시오!’

김득신의 응원이 은근한 여운으로 남는다. 책을 몹시도 사랑했던 선비들과의 짧은 만남이 밥벌이에 치여 살던 나를 다시 설레게 한다. 다시 꿈꾸게 한다.

‘그래, 언젠간 나도 조선의 선비들처럼 책만 보며 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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