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도 '일시정지' 버튼이 있나요?
'빨리 감기' 인생
만약 내 삶에도 속도 버튼이 있다면, 지난 30년 간 내 인생은 줄곧 '빨리 감기' 버튼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빨리, 빨리, 빨리! 다소 느린 행동과 신중을 기하는 성격 탓에 빠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나지만 내 안에서 만큼은 쉴 새 없이 '빨리 감기' 버튼을 눌렀다.
초등학교 때는 어떻게 하면 친구들보다 빨리 수학 문제를 풀까? 고민했고, 중학생 때는 고등학교를 고등학생 때는 대학교를 대비하며 전전긍긍했다. 대학생이 되어선 한숨 돌리려나 했는데 학점, 장학금, 대외활동, 아르바이트, 연애까지 뭐가 그리 급급했는지 모르겠다. 퀘스트 깨듯 살아온 지난날의 관성 때문인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실은 나에게도 대학만 졸업하면 '갭이어'라는 걸 가져보려는 나름의 원대한 꿈이 있었다. 처음으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궤적에서 벗어나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 홀로 걷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은 여전히 마음 한편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졸업을 코 앞에 둔 시점에 아버지가 권고사직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확히 그 시점, 실습기관에서 졸업예정자인 나에게 일자리를 제안하셨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같은 시기에 50대의 아버지는 권고사직을 20대의 나는 잡오퍼를 받았다. 그동안 가족으로부터 받은 경제적 지원을 갚을 차례였다. 그렇게 나는 '정지' 버튼 누를 시기를 또 한 번 놓쳐버렸다.
뜻밖의 멈춤
내 손으로 직접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건 여유가 필요해서도, 못다 이룬 꿈을 좇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뜻밖의 상황이 대차게 걸어왔던 내 발목을 잡았다. 그건 바로 ‘임신'. 사랑스러운 아기를 임신해서가 아니라 임신을 못 해서였다. 혹자는 갑갑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차곡차곡 쌓아둔 파워 J의 인생 계획이 있었다. 24살에 취업을 하고, 27살에 결혼을 해서 신혼을 즐기다 30세 미만에 출산을 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그렇다면 현실은?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29세에 하긴 하였지만 바로 임신만 한다면 출산 목표는 달성할 수 있었다. 대학, 취업, 이직, 대학원, 결혼까지 이 정도면 뜻한 대로 살아온 인생이었으니까 이 또한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의 양쪽 난소는 오만한 나에게 머리를 쿵! 하고 쥐어박듯 피혹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 "얼른 시험관 해야겠네요."
한 번도 그냥 쉬어본 적 없으시죠?
신혼 5개월 차,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난임휴직을 신청했다. 일순간 모든 게 멈추었다. 직장도, 대학원도,인간관계까지도.. '하면 된다'는 성공 신화의 주인공은 어느새 사라지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더라는 인생의 가르침을 뒤늦게 깨달은 내가 여기에 있다. 이 단순하면서도 무거운 진리를 깨닫기 전까지는 마음이 요동치고 힘이 들어 상담센터를 찾았다. 왜 하필 나인지, 시험관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계속해도 왜 안 되는지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휴직까지 했는데도 안 되니 나만 정체된 것 같았다. 상담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냥 쉬어본 적 없으시죠?"
"네.."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요."
나는 지금 어쩌다 멈췄다. 사실상 멈춤의 이유는 빨리 감기를 위한 빌드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작은 불순한(?) 의도였을지언정 '일단 멈춤'의 효과는 예상외로 상당하다. 나는 한 발 한 발 느리게 걷게 되었다. 늦게 눈을 뜨고, 늦게 밥을 먹고, 천천히 하루를 시작한다. 그래도 괜찮다. 조급하지 않다. 느리게 살아보니 사회로 향했던 시선이 점차 나에게로 향한다.
그동안 나는 빨리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사회의 흐름에 휩쓸려 온 밀물에 불과했다. 이제야 나만의 속도를 찾았다. 내 속도 안에서는 때론 세상과, 때론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 급할 땐 보지 못했던 틈을 찾은 것이다.
요즘 백수를 뭐라고 하는지 알아?
얼마 전,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에 다녀왔다. 한 친구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의 퇴사 소식을 오픈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과 말투에서 풍기는 뉘앙스로 짐작하건대 실직자의 아픔이 한 방울도 느껴지지 않는 기쁨의 퇴사였나 보다. 당찬 그녀는 이미 휴직한 나를 향하여 물었다.
"요즘 백수를 뭐라고 하는지 알아?"
"몰라? 백조?"
"휴.식.아.티.스.트!"
푸하하. 그래! 나는 휴식 ARTIST이다. 부인과 질환을 가진 환자도 아니고, 임신을 준비하는 난임치료자도 아닌 온전한 휴식을 즐기는 예술가이다. 예술가의 이름으로 '빨리 감기' 버튼은 가뿐히 지워버렸고 '재생'과 '일시정지'만 남겨 두었다. 삶이라는 도화지 위에 내 인생을 마음껏 그려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