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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림 Jun 05. 2023

후멜로와 홍제천

동네생활자의 일상로그

후멜로

자연주의 정원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네덜란드 정원가 피트 아우돌프의 시작점이다. 순환하는 자연 생태를 다섯 개의 계절로 표현해 낸 곳이다. 후멜로는 네덜란드 시골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태화강 생태복원에 피트 아우돌프가 참여하면서 국내에서도 유명해졌다. 조경사, 정원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거장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지만 대중에게는 이 참에 알려지게 된 셈.


후멜로 정원의 한 때, 피트와 안야 아우돌프 부부


짜인 무질서 속의 질서

모순되지만 후멜로의 정원은 자연 그대로를 닮았다. 자연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대자연이라는 설계자에 의해 잘 짜인 각본처럼 질서 정연하다. 꽃을 좋아한다고 풍성한 꽃잎을 자랑하는 꽃들만 군락을 이루지 않는다. 꽃그령, 참억새, 큰개기장, 크리소포곤 그릴루스 같은 그라스와  사초가 채도와 명도가 다른 풍성한 초록을 배경으로 깔면, 꽃들은 그 존재감을 더욱 드러낼 수 있다.

여러해살이 풀들은 봄에 싹을 틔워 여름의 녹음을 지나, 가을 단풍 들고, 겨울에는 시들어 눕는다. 다음 해 봄을 준비하며. 아우돌프의 정원은 여러해살이들의 생애주기를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라스와 사초, 꽃들이 어우러진 정원 뒷편으로 보이는 건물


공공녹지 홍제천

정원은 아니지만, 홍제천은 공공녹지로써, 억새와 갈대, 꽃창포, 오디나무, 느티나무, 오동나무가 시냇물 주변으로 무질서 속에 질서를 이루고 있다. 이 균형 잡힌 풍경은 대자연이라는 설계자가 잘 꾸며놓은 정원 같은 인상을 준다.


홍제천은 서울의 많은 지류 하천들이 그렇듯, 한강의 기적 이전 시기에는 온갖 오물을 받아내는 악취 나는 오수하천이었다. 그러다 대한민국 GDP가 올라가고 시민들이 삶의 질에 관심을 기울이며 2000년대 들어와 조금씩 정비사업이 이뤄졌다. 정비사업이 시작된 시기는 하천마다 다르다. 홍제천은 오랫동안 소외받은 저개발 지역이었다가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고, 본격 개발이 이뤄지면서 일대도 조금씩 정비를 하는 모습이다.


작은 하천이고 인근에는 낡은 집과 신축 아파트가 뒤섞여 어수선한 분위기도 있다. 게다가 내부순환도로가 하천 위를 달리는 구간도 있어 시야가 갑갑한 곳도 있다. 혹여 사진을 보고 아주 잘 가꿔진 공공녹지나 공원을 기대하고 와, 실망할 분들이 있을까 미리 이실직고 하자면 그렇다. 가문 날이 며칠이고 이어질 때, 유속이 느린 하천이 부패하여 유쾌하지 않은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상상 그대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유기물의 생사가 얽히는 곳이니, 생명력 이면의 것들이 존재한다. 부패와 죽음.


비 오는 날 모래섬 위, 체온을 나누는 아기 청둥오리


그러나  여러 날을 가까이에서 보면 사랑스럽다. 이 하천에서 청둥오리와 왜가리, 쇠백로는 각자의 식생을 존중하며 공존한다. 봄에서 여름 동안 새끼를 키워내는 청둥오리 어미의 분주함이 시선을 빼앗는다. 오밀조밀 몰려다니며 먹이를 주워 먹고 바위 위를 달리고, 물 위를 다이빙하는 새끼들은 크기만 작을 뿐 성체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한다. 자연이 좋아지면 나이가 드는 거라고 하던데,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동식물 지닌 생명력에 매료되곤 했다. 그냥 좀 더 자연에 끌리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나는. 


햇살이 찬란한 날은 선명하고 높은 채도로, 비가 오는 날은 무채색이 섞인 톤다운 무드로, 홍제천은 버츄얼(virtual) 풍경화이자, 자연이 선사하는 천연 안정제다. 마음이 울적한 날에는 산책로 한편으로 흐르는 작은 시냇물 소리와 그 주변을 초록으로 물들인 야생화와 사초, 오디나무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사락사락 나뭇잎을 쓰는 바람소리가 마음의 먼지를 쓸어내는 빗자루 소리처럼 여겨진다.


홍제천 산책을 한 뒤로는 사건, 사고, 살인 등 자극적인 유튜브 콘텐츠나 뉴스를 멀리하게 되었다. 꼭 홍제천 한정은 아니니, 마음이 좋거나, 안 좋거나 동네 녹지 산책을 추천하며, '후멜로' 남은 페이지를 넘긴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2258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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