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금기를 깨고 마신 술 한 잔

노동의 마침표, 취향의 시작

by 김솔솔

오랜만에 서울행이었다. 기차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며 1시간 30분의 여정 끝에 당도한 곳은 여의도. 전 직장 업무로 알게 된 이사님을 뵙기 위한 길이었다. 그 업무를 그만둔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인연의 끈을 놓지 않은 선배가 자리를 마련해 준 덕분이었다.


이사님은 명망 있는 학자이자 치열한 직업인으로 시대를 살아오신 분이다. 인품이 훌륭해 담당 직원으로 배석하던 시절부터 존경해 마지않던 어른. 나이 듦에 침잠하기보다 자신이 가진 지식과 사회적 자원을 어떻게 나눌까 고민하는 어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퇴직한 백수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다. 이런 귀한 인연을 마주하는 자리라면, 며칠간 고수해 온 금주의 원칙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홋카이도에서 온 사연, 그리고 만개하는 향기

어른은 회합(會合)의 자리를 위해 육각형 지함에 담긴 사케 한 병을 가져오셨다. 홋카이도의 어느 소학교 교장에게 받은 선물이라 하셨다. 동아시아 정치와 문화를 전공하신 교수님께서 홋카이도 현으로부터 공로상을 받게 되셨고, 그 과정에서 소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셨단다. 대강당 마룻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초롱초롱한 눈으로 강연을 듣던 아이들을 복기하는 이사님의 시선 끝에 기분 좋은 정적이 머물렀다.


스토리가 있는 술은 맛있는 법이다. 게다가 일본의 냉장고라 불리는 청정 지역의 쌀로 빚은 준마이 다이긴조라면 더더욱. 칠링용 유리병에 옮겨진 술을 한 잔 받았을 때, 화사하게 만개하는 향에 뇌파가 요동쳤다. 한때 스무 종류의 사케를 모아두고 시음 공부를 했던 경험에 비추어 봐도 이 술은 차원이 달랐다. 불필요한 노이즈가 완벽히 제거된 고해상도 음원 같달까. 혹은 오차 없이 잘 설계된 건축물처럼 첫 향부터 목 넘김까지의 레이어가 정교하게 쌓여 있었다. 한 모금 마시니 실크처럼 부드럽게 흘러가는 질감에 저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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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대기업 희망퇴직.서울을 벗어나 살아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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