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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케터 강센느 May 22. 2016

곡성을 보고 탄성을 외치다

영화 <곡성>에 대한 몇 가지 단상

1. <곡성>은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156분, 짧지 않은 러닝타임이다. 아니 확실히 길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긴 호흡의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결코 호흡이 길어선 안된다. 관객의 들숨과 날숨을 쉴 틈 없이 컨트롤해야 비로소 관객 개개인의 소중한 시간은 오롯이 러닝타임에 스며들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곡성>은 단연 수작이다. 작위적이지 않고 풍부한 개연성을 내포한 플롯의 전개, 그 사이에 감독이 심어놓은 힌트(혹은 미끼)들을 좇다 보면 어느새 스크린에는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곡성>은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관객들 사이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전개된다. 좋은 영화는 크레딧까지 곱씹게 하고, 더 좋은 영화는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게 내 지론이다. 나홍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관객들이 <곡성>이 끝난 이후에도 다양한 스토리를 만들어가길 바랐고 실제로 그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댓글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든 책이든 모든 작품은 개개인의 삶에 들어오는 순간 필경 다양한 잣대를 마주하게 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의미와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법이다. 좋은 작품은 원자핵이 핵분열하며 결합 에너지의 차이만큼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하듯, 관객에 의해 분해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게 된다. 



2. 미끼를 물었다고 자각하는 것은 미끼를 무는 순간이 아니다.



왜 하필이면 자네 딸이냐고? 그 어린것이 뭔 죄가 있다고~? 
자네는 낚시할 적에 뭐가 걸릴 건지 알고 미끼를 던지는가? 
그놈은 미끼를 던진 것이여 , 자네 딸은 그 미끼를 확 물어분 것이고.


많은 관객들이 나홍진 감독이 미끼를 던졌고 자신들은 그것을 물었다고 표현했다. 일광이 종구에게 미끼 얘기를 하는 씬을 볼 때만 해도 관객은 으레 영화를 볼 때처럼 태연하다. 스크린 속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다. 그 미끼를 문 것은 내 딸이 아니다. 다행히(?)도 그 피해자는 스크린 속의 가상 인물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태연함이었는지를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 깨닫게 된다. 물고기는 주변의 물고기가 미끼를 물고 뭍으로 끌어올려지는 모습을 봐도 태연하다(만약 물고기가 그런 상황에 대한 인지를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생선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곡성>을 본 관객은 모두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스크린 속의 미끼가 사실 관객에게 던져진 미끼였음을 두 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 동안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크레딧이 올라갈 때의 어리둥절함에 모두들 폰을 꺼내 들고 '<곡성> 결말 해석'을 검색한다. 근데 그렇게 해석을 봐도 영 마음이 시원찮다. 어떤 해석을 봐도 그럴 듯한데 확실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대체 내가 언제, 어떤 미끼를 물었기에 <곡성>은 이렇게도 막막함을 주는 영화일까. 미끼를 물었음을 깨닫는 순간은 미끼를 무는 순간이 아니기 때문에 관객들은 계속해서 그 미끼가 무엇인지를 되짚어 보게 되는 것이다.



3. <곡성>의 장르적 특성



<곡성>의 장르는 오컬트, 고어가 가미된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 영화이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오컬트, 고어가 가미됐다는 점인데 최근 개봉했던 <검은 사제들>만 보더라도 오컬트는 대부분 신부, 십자가와 같은 요소들을 떠올리게 하는 장르였다. 헌데 <곡성>에서는 무당이 등장했다. 이것은 <엑소시스트>에서 시작된 오컬트의 클리셰에 대한 탈피이며 새로운 시선으로 다가온다. 특히 배경 또한 도심이 아닌 자연경관이 빼어난 농촌 마을이라는 점에서 그 새로움은 배가 된다. 이런 요소들의 변화로 인해 <곡성>은 기존의 오컬트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생소한 미장센을 보여줌으로써 신선함을 더했다. 


그리고 좀비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다. 좀비는 국내 영화계에선 생소한 캐릭터이다. 흔히들 <새벽의 저주>나 <워킹데드> 혹은 <28일 후>의 좀비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농촌 마을의 사람이 좀비가 되고 그런 좀비를 상대로 농기구로 맞서는 사람들의 모습에 관객들은 종종 웃음을 터뜨리는 등 다소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나홍진 감독은 좀비를 등장시킨 것에 대해 접신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던 중 그들이 경험한 현상들을 모아서 보니 좀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그런 모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좀비를 등장시켰다고 했는데 이런 고어적인 요소의 등장도 영화 <곡성>을 더욱 이색적이게 만든 포인트였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곡성>은 반전 영화다. 반전 영화의 묘미는 영화 곳곳에 뿌려져 있던 힌트들이 결말에 가서 그것이 힌트였음이 드러나고 퍼즐처럼 조각이 맞춰진다는 점인데 <식스센스>나 <유주얼 서스펜트>가 정답지에서 문제가 있는 쪽수와 그 문제에 대한 정답과 해설을 명확히 알려주는 문제지라면 <곡성>은 정답지에서 확실한 쪽수를 알려주지 않고 파편적인 정답들만 적어놔서 정답이라 확신하던 문제들까지 헷갈리게 만드는 문제지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으레 반전영화를 보고 나서 '힌트'라고 얘기하는 포인트들을 사람들은 '미끼'라고 표현하고 '곡성의 반전'이라고 말하지 않고'곡성의 결말'이라고 말한다. 반전보다 결말이 궁금한 반전 영화. 이것은 분명 익숙지 않은 장르적 체험이다.



4. <곡성>의 결말, 그것에 대한 해석



<곡성>은 앞서 말했듯, 결말에 대한 의견이 그 어떤 영화보다 분분하다. 그것이 대동소이한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각각의 의견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타당한 근거들을 갖추고 있어서 더욱 놀랍다. <유주얼 서스펙트>에 빗대자면 <곡성> 결말의 해석 포인트는 "카이저소제가 누구냐"일 테고 그 카이저소제의 정체는 효진의 가족을, 곡성의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원인 제공자일 테다.   


영화 중반부까지는 그 역할을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일본인이 독점하지만 일광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순간(일본인은 귀신이 아니라 무당이었다는)부터 이야기의 양상은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 일광과 일본인이라는 명확한 대립각이 무너지면서 피아식별이 모호해지고 무엇보다 이승과 저승의 영역이 모호해진다. 지옥을 떠올리게 하는 음산한 기운의 동굴 속 일본인의 모습과 현실의 마을이지만 귀신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무명이 있는 공간의 모습이 교차적으로 보여지고 그 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종구의 모습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의 결함을 내포한 듯 무기력하고 처연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들이 그랬듯 그의 선택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왜 하필 우리 가족이냐는 그의 곡성에 단지 마음에 의심을 품은 죄라고 답하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다. 그의 의심엔 확실한 인과가 있었고 그런 인과마저 무시하고 의심을 져버리기에 인간의 그릇은 신이 가진 것과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현혹되지 말라고 '인간적'으로 소리 지르던 일광은 악마의 조력자였고 인간처럼 무기력하게 피범벅 시체가 됐던 일본인은 악마였으며, 가장 약해 보였던(인간의 기준에서) 무명은 사실 종구가 가장 의지하고 믿어야 했던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은 현상 속에서 겁 많고 평범한 가장이던 종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의심'이라는 죄로 단죄되어야 하는 것일까? '무조건'이 결부된 믿음은 인간에게 이토록 폭력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래서 같은 인간으로서 무기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에 나홍진 감독은 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가 어떤 이유로 피해를 입는 것일까. 단순히 가해자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게 이유일 수는 없지 않을까. 원인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의 범주가 현실에 국한될 수 없었습니다. 평화롭게 살던 농촌 아낙, 순진무구한 소녀, 평범한 경찰이 고통받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살펴도 현실에선 이유를 찾을 수 없으니, 모든 것이 초현실적인 악의 장난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현실에선 동화의 권선징악이 적용되지 않는다. 세상엔 정말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그런 일을 자주 마주하다 보면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다 보면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과 함께 악마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피어난다. 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만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기에, 그런 현상을 설명할만한 또 다른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곡성에 대한 결말을 찾는 와중에 포털 사이트의 인기 검색어에 뜬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이라는 글자를 보았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귀로 들리는 것을 믿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처럼 불가해한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이유를 <곡성>이 설명해줬던 것일까? 시원하게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한 것은 비단 <곡성>의 결말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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